동아시아사회문화

[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38] ‘동양의 파리’ 하얼빈의 화려한 밤…러시아 망명 여인 엘레나와 ‘살롱 드 하얼빈’의 추억

중동철도 옛 청사에 들어선 하얼빈시 역사박물관 앞에서 필자. 오랜 여정의 이택순은 어느덧 상념에 젖는다. “하얼빈의 추억도 엘레나의 시와 함께 조용히 커튼을 내려야 할 시간이 되었다. 이제 서울로 가야겠다!”

추억의 하얼빈. 우리는 1900년대 하얼빈 지역에 깃든 영혼을 찾기 위해 역사박물관 두 곳을 찾아다니게 된다. 한 곳은 하얼빈 난강구에 소재한 ‘헤이룽장성 역사박물관’이었다. 다른 한 곳은 다오리구 중앙로(중앙대가)에 위치한 ‘하얼빈시 역사박물관’이었다.

‘헤이룽장성 역사박물관’은 헤이룽장(아무르강) 지역 전반의 역사 유물이 풍부하고 접근성이 뛰어나지만, 많은 관람객이 방문해 매우 번잡하였다. 두 번째 장소로 우리는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하얼빈시 역사박물관’을 탐문하며 찾아 나선다. 이곳에서 1920~30년대 이 도시가 창조해 낸 유럽·러시아 문화의 깊은 영혼, ‘근대 모더니즘(Modernism)’의 수많은 파편을 만나게 된다.

자유와 해방의 러시아 여인들 풍광. 하얼빈시 역사박물관

박물관에 걸린 빛바랜 흑백사진은 1920년대 ‘자유와 해방의 도시’ 하얼빈의 상징이었다.

거리의 고풍스러운 벤치에서 웃으며 대화하는 서양 여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의 행복한 표정과 화려한 복장, 패션 속에서 만개한 자유와 여성해방을 목격하게 된다.

여성들의 머리는 1920년대 유행한 단발머리, 이른바 ‘보브 컷(Bobbed Cut)’으로 현대적이고 진취적인 여성해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속박의 긴 머리, 해방의 단발머리!

그녀들은 머리에 푹 눌러쓰는 종(Bell) 모양의,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클로슈 모자(Cloche Hat)’를 쓰고 있었다. 이 도시는 유행의 첨단이었다.

짧아진 치마는 무릎까지 올라와 여성의 각선미를 마음껏 발산한다. 긴 치마와 코르셋의 전통적 압박과 질곡을 과감히 던져버렸다. 구두까지도 활동하기 편한, 발등에 끈(스트랩)이 달린 ‘메리제인’ 구두를 착용한다.

1920년대 말 하얼빈 거리 풍경. 하얼빈시 역사박물관

화려한 서구식 근대 건물이 늘어선 거리에 1920년대 클래식 ‘포드 자동차’가 오간다. 거리에는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 간판이 달려 있어 국제도시 하얼빈을 상징한다.

남성들은 당시 유행하던 테가 넓은 ‘중절모(페도라)’에 양복 정장을 걸쳐 입고 거리에서 담소한다. 진한 머릿기름으로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모던 보이(Modern Boy)’들의 모습이다. 이범석과 현계옥 등 조선인 혁명지사들도 자금 조달과 무기 구입을 위해 숨죽이며 중앙로 거리에 나타난다. 러시아인,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이 섞여 있는 다문화 도시였다.

중동철로구락부 댄스파티 사진 <하얼빈시박물관 소장>

하얼빈은 파리와 모스크바의 패션이 실시간으로 유행하던 국제도시였다. 중동철도를 따라 유입된 패션과 유행은 곧바로 상하이, 경성(서울)과 도쿄로 확산되었다. ‘중동철로구락부’에서는 1908년에 이미 교향악단이 편성되었고, 사교클럽에서 파티와 서양 사교춤이 퍼져 나갔다. 쑹화강에는 증기선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새들의 춤과 어우러져 저녁노을을 수놓는다.

쑹화강 사진. 하얼빈시박물관 소장

“무정한 세월은 고요히 사라지고, 이국의 저녁노을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네.
수많은 아름다운 도시를 보았지만, 흙먼지 날리는 하얼빈은 내 가슴에 영롱하네.”
– 엘레나 N. 네델스카야(Елена Николаевна Недельская)

엘레나의 하얼빈 송가 한역본,

‘하얼빈시박물관’에서 중국어로 표기된 러시아 시인의 시를 만나게 된다. 이 시의 작가는 시인이며 문학가이자 연출가인 엘레나 N. 네델스카야라는 러시아 이민자 여인이었다. 그녀는 흑백사진 속 ‘신여성(Flapper, 플래퍼)’이 되어 중앙로 거리에서 자유롭게 담소하며 시와 음악을 노래했다.

‘엘레나’는 1912년 모스크바 북쪽 야로슬라블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니콜라이’는 러시아제국의 귀족으로, 1917년 발생한 러시아혁명의 제1급 숙청 대상이었다.

죽음과 추방이 다가옴을 감지한 ‘니콜라이’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번민 끝에 중동철도로 연결된 극동의 도시 하얼빈으로 향하는 망명열차를 탄다.

그녀의 나이 8살 되던 해(1920년)였다.

쑹화강의 잔물결에 추억이 흐른다. <사진 이택순>

러시아식 생활방식과 문화가 19세기 말부터 정착된 하얼빈(哈尔滨)이었다. 러시아어로 일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며, 평화와 자유를 안겨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엘레나’는 학창 시절 쑹화강(松花江) 강변을 거닐며 경이로운 이국 생활에 젖었다. 사춘기와 청소년기에 음악과 문학을 공부하고 하얼빈의 음악학교 교사로 일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전쟁 상처와 러시아혁명의 광풍 속에 1920년대가 유령처럼 다가왔다. 서구 유럽에는 인간성의 상실과 문명에 대한 환멸로 허무주의가 팽배했다. 문학과 예술 전반에 사실주의의 틀을 깨고 자유를 향한 열망이 끓어올랐다. 이른바 ‘모더니즘(Modernism)’의 혁신적인 문학 조류가 빛을 발하는 시기였다.

다행히도 하얼빈은 중국, 러시아, 일본 간 패권의 공백지대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중동철도 사령관 ‘호르바트’는 자유 하얼빈의 수호자였다. 러시아의 자유 지성과 지식인 20만여 명이 대거 망명해 왔다. 그들은 예술과 자유의 도시 파리를 동경했다. 이들에 의해 신문학의 조류와 예술, 패션이 파리와 모스크바에서 하얼빈으로 실시간으로 도입되어 유행했다.

1920년대 하얼빈의 모던 걸과 모던 보이. 하얼빈시박물관 소장 작품

엘레나는 여성해방을 실천하는 ‘모던 걸(Modern Girl, Flapper·신여성)’로 자란 꿈 많은 여인이었다. 시인이자 작가, 연출가로 하얼빈의 각종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엘레나의 자택 응접실에 많은 문학인과 음악 예술인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살롱 드 하얼빈’을 열며 모더니즘의 예술과 문학을 이끌게 된다. 일본의 만주 침략 속에서도 하얼빈의 국제성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다가온 소련 공산주의는 엘레나와 러시아 망명자들에게 또다시 절망이었다. 그녀는 다시 자유를 찾아 1953년 호주 시드니로 이주하게 된다. 그녀는 하얼빈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하얼빈 송가’를 노래하게 된다.

하얼빈의 추억도 엘레나의 시와 함께 조용히 커튼을 내려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 하얼빈의 화려한 밤이여! 이제 서울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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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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