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박 3일간의 내몽골(内蒙古, 네이멍구) 답사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하얼빈으로 향한다. 만저우리에서 하얼빈까지 약 980km 거리를 열차로 12시간 이동해야 하는 답사 일정이다.
인구대국 중국에서 장거리 열차여행은 좌석을 예약하기가 쉽지 않다. 15일 전에 예약해도 ‘편안한 침대(연와석, 1등석)’는 이미 매진이다. 우리는 하얼빈행 열차의 ‘딱딱한 침대(경와석, 2등석)’를 이용하게 된다. ‘경와석’은 6명이 함께 사용하며 개폐문이 없고 침대가 3층까지 있다. 물론 각 층별로 요금이 다르다. 승객인 남녀 6명의 행동을 슬며시 지켜볼 수 있으니 흥미롭다.
이 긴 이동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일정의 중요한 과제였다. 대륙의 열차 이동에서 얻은 노하우는 야간열차를 이용해 숙박과 이동을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다.
정차하는 역에 잠시 내려 도시를 주마간산이나마 살펴보는 것이다. 심야의 플랫폼, 가로등 불빛 아래 스며 있는 이국 도시의 향기를 호흡할 수 있다.

이렇게 새벽녘에 만난 초원의 도시가 하이라얼(海拉尔)이다. 하이라얼은 내몽골 자치구의 광역시급인 후룬베이얼시를 구성하는 구(区) 가운데 하나였다. 후룬베이얼 일개 시의 면적이 한반도 전체 면적의 1.2배(약 25만 제곱킬로미터)다. 한반도에서 자란 우리에게는 공간을 보는 시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후룬베이얼 지역은 고대와 중세 역사에서 돌궐(투르크)제국, 몽골제국의 영역이었다. 이 광활한 초원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며 관동군 제23사단 3만 명을 투입했다. 1개 사단 병력으로 한반도보다 큰 지역을 장악하려 했다.
중국과 소련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수준의 군대로 깔보았다. 일본군의 자만은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었다.

구름이 옅게 덮인 가을 달빛 아래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을 긴 터널로 통과하게 된다. 한반도보다 더 긴 1,500km의 남북으로 이어진 이 산맥은 2천 미터급의 험준한 산악이 마치 병풍처럼 서 있다. 이 산맥을 경계로 서북쪽의 건조한 ‘내몽골 초원’과 동남쪽의 비옥한 ‘동북평원’이 대비된다.
우리 민족의 북쪽 경계로, 고구려와 발해의 영향력이 미치는 끝이었다.
이 먼 거리를 말과 도보로 이동했음을 감안할 때, 고대 국가의 지배력은 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리적 여건과 지정학적 요인상 한민족의 북방 한계였다.
이어서 중동철로(中东铁路, 빈저우선·하얼빈~만저우리)는 헤이룽장성의 옛 수도 치치하얼(齊齊哈爾)을 지나 아시아 최대의 평원인 동북평원에 들어선다.
이 평원을 몇 시간 달렸을까? 석유가 쏟아져 나오는 다칭(大庆)을 지난다. 마치 캘리포니아 유전지대를 지나는 듯 수천 개의 ‘펌프잭(추출장비)’이 상하로 움직이며 끊임없이 석유를 뽑아낸다. 중국의 힘을 본다. 그리고 열차는 쑹화강을 건너 하얼빈 중앙역으로 다가선다.

새벽 열차는 ‘하얼빈 중앙역’ 플랫폼에서 수많은 청춘을 거대한 도시의 품속으로 쏟아 놓는다. 어떤 청춘은 하얼빈 국제공항에서 서울, LA로 향할 것이다. 또 다른 청춘은 상하이, 베이징으로 향할 것이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수려한 근대의 얼굴을 가진 현대도시, 하얼빈(哈爾濱) 하늘 아래 꿈을 수놓을 것이다.
장엄한 국제도시 하얼빈은 언제부터 이런 색깔을 가지고 역사에 등장했을까?
하얼빈의 개척사는 19세기 말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중국 구간 ‘중동철도(中東鐵道, 동청철도)’의 탄생과 함께한다.

1896년 러시아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와 청나라 총리 ‘이홍장’은 모스크바에서 ‘중러밀약’을 체결한다. 중국에 심하게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하얼빈에 폭풍우처럼 근대의 변화를 몰고 왔다.
1898년 철도 공사가 착공되며 불과 수천 명이 거주하던 쑹화강(松花江) 연안의 작은 어촌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시작한다. 러시아 군인, 철도 기술자, 백인 노동자, 중국인 노무자, 조선인(고려인)들이 모여들어 5년 만에 상주인구가 5만 명을 넘어선다. 쑹화강을 횡단하는 철교가 건설되고 중동철도가 개통된다.

철도 개통 직전인 1902년, 러시아는 이곳의 총책임자로 육군 중장 ‘드미트리 레오니도비치 호르바트(Дмитрий Леонидович Хорват, 1858~1937)’ 장군을 임명한다. ‘호르바트’는 러시아 케르손주(현재 우크라이나) 귀족의 자제로, 토목을 전공한 공병장교 출신 장군이었다. 그가 맡은 책임은 중동철도를 보호하는 ‘철도경비사령관’과 중동철도의 관리·운영, 철도 조차지와 부속 지역을 관할하는 ‘중동철도국장’을 겸임하는 막중한 권한이었다.
하얼빈에 주둔한 그는 군사, 행정, 사법권을 관할하며 1920년까지 17년간 집권했다. 집권 중 하얼빈 도시 건설과 철도 경영에 집중했다. ‘니콜라이 유고비치’라는 최고의 건축 엔지니어가 전문가로 참여했다. 건축에 대한 두 사람의 안목과 호르바트의 장기 집권은 하얼빈의 경관을 급속히 유럽의 도시 스타일로 만들어 갔다.

러시아인들을 위한 성 니콜라이성당이 1900년 최초로 완공되었다.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성 소피아성당(1907년 중앙로의 대표적 건물), 성 이베르성당(1908년) 등 20여 개의 수려한 성당 건축이 이루어진다.
중국의 변방이 르네상스와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국제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동양의 파리’로 불릴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세계의 자본이 유입되고 유럽 유대인의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진다.
체제의 안정과 평온한 치안으로 하얼빈은 무역과 철도 교통의 중심, 동북아의 핵심 도시로 비약한다. 호르바트는 사실상의 ‘만주총독, 만주의 왕’이라 불린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한 1909년에 들어서면 인구는 10만 명을 넘어선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건물과 토지가 러시아의 관할임을 사전에 알았다. 자신의 의거가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러시아의 재판 관할에 속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사건의 국제적 파장을 우려한 러시아가 서둘러 안중근의 신병을 여순(뤼순)의 일본 재판소로 인도한다. 이는 국제법 위반의 소지가 있는 외교 조치였다.
하얼빈에 관한 중국의 주권 행사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1911년 신해혁명 이후 혼란에 직면한 중국 중앙정부(북양정부)는 지방정부를 통제할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만주의 지방 권력은 동북삼성을 장악한 ‘봉천군벌(동북군벌)’ 장쭤린(장작림)에게 맡겨졌다. 장쭤린도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해 북만주에 대한 실력 행사를 기피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유라시아에 거대한 인적·물적 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하얼빈은 혁명의 무풍지대였다. 본토는 전쟁의 후유증과 혁명의 진통으로 혼란스러웠지만, 하얼빈은 자유와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자본주의 도시로 유지되었다.
선진 열강들은 이권과 정보가 넘치는 만주의 심장 하얼빈에 앞다투어 영사관을 설치했다.
소련,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등 19개국의 영사관이 설치된다. 국제 외교와 첩보전의 주 무대가 되었다. 조선의 망명객과 혁명지사들도 자유 하얼빈에 모여 항일혁명을 도모한다. 하얼빈은 실질적으로 독립국가, 해방구의 모습이었다.
1920년 들어 약 20만 명의 러시아 상류층 귀족, 군인, 지식인, 예술가들이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망명지로 하얼빈을 택한다. 이들이 가져온 유럽 문화는 도시를 채우며 화려하고 장엄한 아르누보, 네오클래식, 르네상스식의 최신 유행과 패션을 몰고 온다.

망명자들은 유럽·러시아 문화를 꽃피우고 자유를 만끽했다. 이들이 만든 이국적인 거리가 현재 중앙로(중앙대가, 키타이스카야 거리)이다.
내일은 이들이 확산시킨 유행과 문화, ‘살롱 드 하얼빈’을 찾아 답사 일정을 채워 보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