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기만 전 동아일보 기자이자 전 청와대 춘추관장이 1971년 고교 시절 처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 56년간 이어진 인연을 회고한 기록이다. 한 권의 책과 여러 장의 사진, 그리고 언론인과 청와대 참모로 함께한 경험을 통해 정치인 김대중을 넘어 사상가이자 민주주의자, ‘행동하는 양심’으로서의 인간 김대중을 증언한다. 개인의 추억을 넘어 한국 현대정치와 언론사의 한 장면을 담은 생생한 구술 기록이기도 하다. <편집자>
고3 소년이 품은 꿈,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다
[아시아엔=김기만 정론실천연대 명예대표, 김대중정치학교 대외협력본부장,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노조위원장, 전 청와대 춘추관장] 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된 보물 같은 책 한 권을 간직하고 있다. 또 전북일보사에서 구한 보석 같은 사진 한 장, 기자로 일하던 동아일보에서 촬영해 준 소중한 사진 한 장, 그리고 청와대에서 DJ와 함께 찍은 몇 장의 사진도 소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던 1971년 3월 13일 발행된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다. 선거일(4월 27일)을 불과 한 달 보름 정도 앞두고 나온 책이다.
출판사는 평생 김대중을 도왔던 윤형두(1935~2023) 대표의 범우사였고, 편찬은 대중경제연구소가 맡았다. 책값은 100원이었다.

책을 펼치면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하는 메모 세 줄이 남아 있다.
“존경하는 김대중 선생님의 대중경제를 사다.” “1971년 3월, 전주고등학교 3년 김기만.” “1971.4.27. 제7대 대통령 선거! 꼭 이기세요!!”

책은 1971년 3월 13일 발행됐다. 구입 날짜를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메모로 미루어 보면 발행일 이후부터 선거일인 4월 27일 사이에 산 것으로 보인다.
1966년 창립된 범우사는 올해로 60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 대표적인 인문·고전 출판사다. ‘범우문고’, ‘범우고전선’, ‘세계문학선’ 등을 꾸준히 펴내며 4,500여 종의 책을 출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 범우사에 이 책 초판본이 남아 있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차마 묻지 못하고 있다. 혹시 이 책이 지금 내 손에 남아 있는 귀한 초판본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다.
전주고 유세장에서 시작된 ‘짝사랑’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새삼 놀란다. 당시 40대 중반의 김대중은 외자 도입의 문제와 대책, 농업정책, 농협 개혁, 토지개량조합, 노동운동, 소득분배, 사회보장 확대, 재정·금융 대안, 중산층 형성 방안 등 경제와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정책을 폭넓게 제시하고 있다.
『대중경제 100문 100답』의 첫 질문은 “대중경제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이고, 마지막 100번째 질문은 “대중경제 체제하에서의 소득정책의 방향”이다.

김대중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미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예비군제 폐지’ 등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외교·안보 공약을 내세워 색깔론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 분야에서도 박정희 후보와 뚜렷이 구별되는 체계적이고 개혁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반세기가 넘은 지금 다시 읽어도 놀라울 만큼 앞서간 정책 구상이다.
그 책은 단순한 선거 홍보물이 아니었다. 한 정치인의 국가 경영 철학이 담긴 설계도였고,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한 소년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보물’이 됐다.
언론자유 투쟁과 이어진 깊은 인연
그로부터 16년 지난 1987년 9월, 다시 DJ와 깊은 인연을 맺는 일이 벌어졌다.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월간지 <新東亞>는 1973년 8월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에 얽힌 비화를 취재해 보도하기 위해 1987년 9월 초 이후락(李厚洛) 전 중앙정보부장을 인터뷰했다.

납치사건의 최종 결재자가 박정희인지 이후락인지와 미국의 개입 여부, 생환 과정 등을 파헤치는 게 취재의 핵심이었고, 9월 18일경 발간되는 10월호에 보도할 예정이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 측은 “이 기사는 절대 나갈 수 없다”며 <新東亞>를 인쇄하는 동아출판사(동아일보와 무관한 독립 회사)를 인력으로 점거했다. 잡지 인쇄 자체를 막겠다는 태세였다.
그렇게 시일이 흐르면서 잡지를 낼 수 없게 되자 동아일보 기자들도 정부의 언론자유 침해를 비판하며 항의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25일 금요일이 됐다. 잡지를 내야 하는 18일은 이미 지나 한 주일이 경과됐고, 시중에는 <新東亞>가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한 소문들이 무성했다. 그런데 동아일보 기자들이 농성하고 있던 세종로 사옥 3층 편집국에 이날(25일) 밤 11시 20분경 김대중 선생(당시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 나타났다. 투쟁하는 기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고 사전 예고는 전혀 없었다. 그는 “여러분의 용기 있는 투쟁을 존경의 마음으로 응원한다”며 “6월 항쟁의 정신조차 잊고 있는 저 中情(중앙정보부) 세력에 승리해서 자유언론을 실천하고 승리해달라”고 당부해 큰 박수를 받았다. 당 대변인이던 고(故) 장기욱(張基旭) 의원(재선, 충남 서산·당진)과 예춘호(芮春浩) 의원(3선, 부산), 그리고 현재 92세에도 정정하게 활동하는 김진배(金珍培) 의원(재선, 부안·김제)이 동행했다.
그런데 DJ가 짧은 연설을 끝낸 뒤 기자 대표를 찾는 듯했고, 때마침 맨 앞에 서 있던 필자의 손을 DJ가 잡고 굳게 악수하더니 금일봉(金一封)을 건네줬다. 아마도 다른 기자들이 정장 차림인 데 비해 필자는 셔츠 차림이었고, 셔츠에 ‘언론자유 쟁취’라고 쓰인 리본도 달고 있어서 농성을 주도하는 기자로 봤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확인하니 금일봉은 50만 원(현재 가치로 약 200만 원)이었다.
다음 날인 26일 토요일 늦은 밤, 당시 김병관(金炳琯) 동아일보 대표(당시 부사장)는 농성 기자들에게 “항의의 표시로 이후락 인터뷰 부분 20쪽을 백지로 내고 잡지를 발간하자”고 제의했다. 필자가 나서 “내일이 일요일이니 하루만 더 버텨보자”고 말했다. 그날은 집에 들어가 잤다. 그런데 다음 날인 27일 일요일 이른 아침 김병관 대표가 전화를 줬다. “어이, 김 기자. 정부에서 그 인터뷰 그대로 실어도 된다고 방금 연락해왔어. 우리가 이겼어!”라고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일어나 회사로 갔다. 농성장에 남아 있던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27일 정오 문화공보부는 “정부는 신동아 발간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당초 발행일보다 열흘 가까이 늦게 시중에 나온 <新東亞> 1987년 10월호는 무려 40만1천 부가 팔려 한국 잡지 역사상 전무후무한 판매 기록을 세웠다. 일간지 동아일보의 최근 발행부수가 40만 부 정도이니 <新東亞> 40만1천 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기획, 취재, 보도를 진두지휘한 장행훈(張幸勳) 당시 출판국장(당시 50세, 2018년 81세로 작고)과 당시 김종심(金種心) <新東亞> 부장(당시 44세)에게 감사드린다. 무엇보다도 똘똘 뭉쳐 항의농성을 벌였던 출판국과 편집국 기자 동료들의 노고와 단결이 승리의 요인이었기에 동료와 선후배들에게도 물론 감사드린다. 출판국 간부와 기자들은 1987년 10월호 <新東亞>가 발간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청와대에서 배운 국가경영의 철학
해외언론 인터뷰라는 프리즘에 비친 DJ는 성실하고 치밀하며, 영리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이었다. DJ는 필자가 미리 준비해드린 인터뷰 자료를 모두 읽은 것은 물론, 자신이 축적한 지식과 경험까지 더해 인터뷰에 임했다. 특히 인터뷰가 시작되기 직전 DJ는 인터뷰가 있는 방 옆의 작은 방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자료를 보고, 그 자료는 그 방에 두고 나와 빈손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생각해 보라. 인터뷰하는 기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자료도 없는 DJ가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답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DJ는 그런 식으로 외국 기자들을 놀라게 해주고, 그런 소문이 널리 퍼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02년 6월 4일(화)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월드컵 축구 D조 예선 첫 경기인 폴란드전이 열렸다. 전반에는 황선홍이, 후반에는 고(故) 유상철이 한 골씩 넣어 2대 0으로 완승했다.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거둔 첫 승리여서 의미가 더욱 컸다. 이 경기에 DJ가 임석했다.
마지막은 퇴임 직전인 2003년 2월 말 대통령 부부 및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과 함께한 사진이다. 노동조합 설립과 세습 승계(현 김재호 동아일보 회장) 반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동아일보에서 오너인 김병관 대표와 싸우면서 숱한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던 필자에게 청와대 근무를 권했던 이가 당시 공보수석이던 현 박지원 의원이다.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일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때 처음 뵈었고, 작고할 때까지 38년간 많은 선연(善緣)을 맺었다. 지금도 김대중재단 산하 ‘김대중 정치학교’의 대외협력본부장을 맡고 있어 인연은 56년째 이어지고 있다. 다음 달인 8월 18일이면 DJ 서거 17주기다. 정치가이자 대사상가, 철학자였고 평생 ‘행동하는 양심’으로 애국애민을 실천했던 거인 후광(後廣) 선생이 그립다.

이처럼 큰 인연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소중히 여기는 93쪽짜리 소책자도 있다. <한국의 현대사가 묻는 것>(갈릴리문고)이라는 제목의 이 책자는 DJ가 미국에서 사실상 망명 생활을 하던 시절, 일본의 권위 있는 시사월간지 <세카이(世界)>를 발행하는 이와나미(岩波)서점의 야스에 편집장이 DJ를 찾아와 6시간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소책자로 묶어낸 것이다. 총 6부로 ‘납치사건과 일본정부’, ‘광주항쟁에 관하여’, ‘전두환 정권의 본질’, ‘한국경제의 현상과 타개 방향’, ‘민중혁명의 시대’, ‘일본과 미국에 진언한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자 속표지를 보니 ‘1985년 4월 5일, 장영달(張永達) 선배(78) 개업식에서/배기선(裵基善) 형(76)으로부터 받음’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그 위에 ‘풀무원 여의도지점 개업’이라는 메모가 있는 것을 보니 원경선(元敬善) 선생(원혜영 전 5선 의원의 부친, 2013년 100세로 작고)이 운영하던 풀무원 여의도지점을 장영달 선배가 맡아 운영하게 된 개업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맨 아래쪽에는 ‘동아일보 김기만 기자’라는 책 소유자 표시가 있다.
훗날 1992년 14대부터 17대까지 4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국회 국방위원장을 역임한 장영달 선배는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8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뒤 일자리를 찾고 있을 때였다. 또 2000년 16대부터 18대까지 3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국회 문화관광위원장을 역임한 배기선 형은 당시 DJ의 비서관이었다. 41년 전인 1985년 이 책을 주고받은 배기선 형과 필자는 지금 김대중재단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배기선 형은 사무총장을, 필자는 김대중 정치학교 대외협력본부장을 맡고 있다. 아, 인연의 오묘함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