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에서 보면 숙부에게 쫓겨 열여섯 살에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은 단종의 종잇장처럼 가벼운 시신이 청령포의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을 호장(戶長, 향리직의 우두머리) 엄흥도(유해진 분)가 건사한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이 있었지만 엄흥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물에 뛰어든다.
영화는 엄흥도가 가장 비통한 표정으로 단종의 작고 가벼운 시신에서 흰 옷소매 아래로 나온 손을 하염없이 응시하면서 끝난다. 단종의 얼굴은 물속으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장항준 감독의 이 영화는 조선의 비운의 왕 단종의 마지막 4개월을 유배지 마을 사람들과의 따뜻한 교감으로 그려내며 관객들을 울렸다.

유해진의 묵직하고 선이 굵은 연기와 박지훈의 섬세한 왕의 고뇌가 어우러진 연기의 결합은 단순한 사극이 아니라 인간애의 본질을 되새기는 메시지를 전하며 전 국민적 공감을 얻었다. 장항준 감독은 “한 번도 천만 관객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 터여서 제작진, 배우, 관객 모두에게 뜻밖의 기쁨을 주었다.
장 감독은 한 라디오에 출연해 “관객이 천만을 넘으면 전화번호 바꾸고, 개명하고, 성형하겠다”고 공언했었다. 그러다가 관객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자 “그건 농담이었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뜻에서 광화문에서 시민들께 커피를 드리는 행사를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결국 그는 지난 12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 앞 광장에서 커피차를 세워놓고 인산인해를 이룬 관객들에게 직접 커피를 내려 드리는 행사를 가졌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울게 만든다”…흥행의 이유
이 영화의 성공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꼽힌다. 먼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단종은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권력 장악 과정 속에서 왕위에서 물러난 뒤 영월로 유배된 비극적 왕이다. 영화는 궁궐의 음모와 권력 투쟁이 아니라 유배지에서 만난 소박한 백성들과의 일상 속에서 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했다.
유해진이 연기한 엄흥도는 거칠지만 속 깊은 마을 사내로, 단종과의 우정은 ‘남자의 정(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영화평론가는 “이러한 서사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지친 현대인들에게 ‘함께 살아가는 삶’의 소중하고 흔치 않은 가치를 일깨웠다”고 풀이했다. 이 영화에 대한 최고의 평은 “다 아는 얘기인데도 울게 만든다”가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민초의, 백성의 이야기인 것이 마음에 든다.
사극 장르의 천만 돌파 영화는 ‘왕의 남자’, ‘광해, 왕이 된 남자’, ‘명량’에 이은 네 번째로, 한국 사극의 불멸의 매력을 재확인했다. 천만 관객 돌파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2024년 ‘파묘’와 ‘범죄도시 4’ 이후 1년 10개월 만에 나온 성과로, 한국 영화 산업의 침체를 딛고 일어선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극장가 전체의 관객이 줄어든 상황에서 개봉 초기 100만, 200만 돌파 속도가 빨랐고, 삼일절 하루에만 81만 관객을 기록하며 입소문을 탔다. 특히 필자처럼 N차 관람 열풍이 불며 가족 단위 관객까지 끌어들였고, 영화가 단순 오락이 아닌 ‘공유의 경험’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었다.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24년 경력 장항준 감독의 첫 천만 영화라는 경사였으며, 유해진의 다섯 번째 천만 주연작이 됐다. 유해진은 못생긴 배우가 어떻게 생존하고 대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롤모델이다. 관객들은 “600년 전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며 재관람을 이어갔고, 이는 영화의 감정적 몰입력이 그만큼 강력했음을 증명했다.
천만 영화가 만든 관광 붐…청령포가 다시 살아났다
이러한 영화 흥행의 또 다른 열매는 영월의 관광 붐이다. 영화 촬영지인 강원도 영월군은 단종 유배지로 유명한 청령포와 주변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삼았다. 천만 돌파 직후부터 관광객이 폭증하며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청령포 일대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단숨에 핫플레이스로 변모했다.

주말마다 버스와 자가용으로 몰려든 관객들은 영화 속 장면을 재현하며 사진을 찍고, 주변 한옥 민박과 로컬 식당은 만원 사태를 빚었다. 육지에서 청령포로는 5분 간격으로 배가 다닌다. 영월군청 자료에 따르면 개봉 후 한 달 새 방문객이 전년 대비 150% 증가했으며 특히 20~40대 젊은 층이 주를 이룬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사례처럼 영화가 지역 관광의 촉매제가 된 전형적인 경우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실제 역사적 장소로, 한강 상류에 자리한 소나무 숲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영화의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엄흥도 집터’로 추정되는 세트장과 왕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던 장소를 찾아들며 “영화보다 더 아름답다”는 감탄을 자아낸다고 한다. 인근 장릉, 선돌, 고씨굴 등도 함께 연계 관광이 이뤄지며 영월의 자연과 역사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급증하는 인파는 양날의 검이다. 교통 체증과 쓰레기 문제, 주차난이 발생하며 지역 주민들의 불편이 커지고 있다. 셔틀버스 증편 등 군청의 대비가 시급해 보인다. 영화와 지역의 시너지 효과는 문화콘텐츠의 힘을 새삼 일깨운다.
‘왕사남’은 단종의 비극을 넘어 ‘사람 사는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영월의 관광객 증가는 단순 숫자가 아니라 역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생명력이다. 영화 스토리의 원전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까지 다시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40년간 단종을 그린 화가 서용선
이 영화, 그리고 단종과 관련해 꼭 소개하고 싶은 화가가 있다. 서용선(徐庸善, 76세)이다. 그는 정확히 40년 전인 1986년 청령포를 처음 방문해 단종의 유배지였음을 알게 됐다. 그는 “험한 봉래산을 뒤로 하고 사면이 강물에 둘러싸여 지금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청령포를 보고 인간이 어떻게 이런 자연을 찾아내어 유배를 보낼 생각을 했는지 놀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지난 40년간 계유정난, 단종, 영월, 엄흥도 등 단종을 둘러싼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조사하고 캔버스에 남겼다. 그는 이 그림들이 ‘역사화’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숱한 슬픔과 고통을 화가의 내면을 통해 형상화한 ‘사실화’, ‘정물화’라고 생각한다.

‘왕사남’을 보는 김에 단종을 40년간 그려온 서용선 화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보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