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섭 칼럼] 궁극의 배후, 모든 의심이 멈추는 자리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시편 24:1-2)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디까지가 진짜일까요?
사도 바울에게 땅끝은 서바나(스페인)였습니다. 당시 세계 지도에서 스페인이 서쪽 끝에 있다고 여겼기에, 바울은 복음을 들고 그곳까지 가려 했습니다(로마서 15:24). 또한 오랫동안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며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조차 천동설과 지구 평면설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누구도 자기 믿음 바깥으로 걸어 나가 실제 세계를 맨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믿음 안에서 세계를 바라봅니다. 바울이 그랬고, 천동설을 믿던 사람들이 그랬으며,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세계가 100년 뒤에도 그대로 참된 것으로 남아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시공간을 살아도 같은 세계를 살지는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으면 보이는 세계만 살고, 모든 현상 뒤에 보이지 않는 배후가 있다고 믿으면 또 다른 세계를 살아갑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믿음이 지어 올린 세계를 진짜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물론 어떤 믿음은 실재에 더 가까울 수 있고, 어떤 믿음은 한참 빗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바깥에 서서 그것을 완벽하게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탐구 정신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현상 이면을 파고듭니다. 한 겹을 벗기면 그 뒤를 의심하고, 또 그 뒤의 배후를 의심합니다. 배후의 배후를 끝없이 추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의심하려 들면 결국 아무것도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의심이라는 행위 자체가 의심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리를 ‘경첩(hinge)’이라고 불렀습니다. 문이 경첩에 고정되어 있어야 열리고 닫히듯, 의심도 의심할 수 없는 어떤 토대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C. S. 루이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투명한 창문이 좋은 이유는 그 너머에 불투명한 사물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투명해지면 세상은 오히려 사라집니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가장 신뢰할 만한 세계관은 무엇인가?”
성경은 첫 장부터 놀라운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것은 온 우주와 역사를 만든 궁극적인 배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심이 매달려 돌아가는 경첩, 끝까지 파고들어도 더는 그 뒤가 없는 궁극의 배후, 모든 창문 너머에 존재하는 불투명한 실재를 가리킵니다.
시편 24편은 그 실재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성경은 세상이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세계 뒤에 창조주가 계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과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는 단순히 종교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세계를 진짜라고 믿고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배후를 찾고 또 찾아도 더 이상 뒤가 없는 자리, 모든 의심이 멈추고 모든 질문이 닻을 내리는 자리, 시편 기자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세계를 믿고 살아가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