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문화

[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31] 대륙의 혼을 깨운 언론인들…연해주에서 시작된 역사전쟁

우리가 방문한 수이푼강(수분하·라즈돌나야·추풍) 유역, 우수리스크 일대는 한민족의 고대국가 발해의 영토이자 중요한 도성이 존재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이 발해의 고토이며 한민족의 혼이 깃든 역사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언제, 누구에 의해 밝혀졌을까? 이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구한말 망국의 역사를 되짚어보게 된다.

우수리스크 수이푼강 유역, 발해 솔빈부의 고토

1905년 을사강제늑약(을사보호조약) 이후 조선인의 격렬한 저항운동은 무력항쟁과 애국계몽운동이라는 두 갈래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을사의병과 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정규군의 저항, 의병연합체인 13도창의군의 무력항쟁이 이어졌다. 한편 실력을 길러 국권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은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비밀결사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다.

또 하나의 흐름은 언론과 교육을 통한 저항이었다. 독립협회 운동과 <독립신문> 발간을 통해 민주적 집회·결사와 자유언론의 힘을 자각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을 창간했다. 언관과 논객, 즉 언론인들은 신문 사설을 통해 침략을 규탄하고 탐관오리를 비판하며 민족의 자주독립과 역사정신을 강조했다.

을사조약을 비판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로 장지연 이 해임되고 기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언론인들 역시 탈출구를 찾아 피난해야 했다. 그들의 피난처는 만주 간도 지역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로 이어졌다.

연해주의 고려인(카레이츠)들은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1905년 이후 신문을 발행하며 조선의 유력 언론인들을 초청해 민족 공론의 장을 마련했다. 성공한 고려인 해운업자 최봉준이 자금을 지원해 발행한 <해조신문>은 해외에서 최초로 발행된 조선인 일간지였다. 해임된 장지연 도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해조신문>의 주필로 취임하게 된다.

단재 신채호/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1910년 4월에는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던 신채호 가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입국했다. 그는 동포신문 <대동공보>와 <권업신문>에서 다시 항일 독립의 필봉을 들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로 활동하던 장도빈(1888~1963·산운) 역시 1912년 북간도 연길(옌지)과 훈춘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는 대한매일신보 시절부터 선배 기자인 신채호 의 역사 인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채호와 재회한 장도빈은 <권업신문>에 논설을 쓰며 그의 사상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장도빈은 신채호가 주장한 고구려·발해 중심의 민족사관을 적극 수용했다. 그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연구에 몰두하며, 조선인에게 잠재된 대륙의 기상을 일깨워 현재의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일본 식민사관에 맞서 대륙사관(민족사관)을 세우며 ‘역사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정치·외교·무력투쟁에 주력했다면,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지식전쟁과 역사전쟁에 나섰다. 대륙사관은 일본 제국주의의 반도사관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유물사관 역시 비판하며, 한민족의 혼과 뿌리를 되살리려는 역사관이었다.

언론인·역사학자·독립운동가 장도빈/네이버

웅대한 조선 역사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최남선을 비롯한 국내 학자들의 심층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역사전쟁’의 최전선에 선 인물들은 연해주로 망명한 박은식·양기탁·장지연·신채호·장도빈 같은 전투적인 언론인들이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은 동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약 30년 뒤 그들이 정착해 발해를 건국하고 수도로 삼은 곳이 북만주의 상경용천부였다.

그곳은 현재 소만 국경 수이푼허와 가까운 만주 지역, 흑룡강성 영안현(닝안시)이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은 시베리아횡단철도와 동청철도 구간에서 하얼빈과 우수리스크를 연결하는 교통 요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한 국가의 수도를 정하는 일은 지도자의 깊은 지정학적 통찰이 담긴 결단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수리스크 외곽 솔빈문화마당 현판

발해에는 5경 15부 62주라는 행정체계가 존재했다. 그중 하나인 ‘솔빈부’는 발해 동쪽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역사서 속 솔빈부는 “솔빈강이 흐르는 광활한 대지이자 명마의 고장”으로 기록돼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망명 언론인이자 역사 연구자였던 장도빈은 1912년 우수리스크 수이푼강 유역의 발해 유적을 답사하며 솔빈부의 흔적을 발견했다. 주택의 온돌 양식과 무덤, 토기 등이 한반도의 것과 동일했던 것이다. 역사서 속에서만 존재하던 솔빈부가 실제로 우수리스크 유역에 존재했음을 고증해낸 인물이 바로 언론인 장도빈이었다.

솔빈강은 곧 수이푼허, 즉 러시아어 라즈돌나야강과 같은 강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인(고려인·카레이츠)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이것 역시 조선 역사의 기막힌 반전이었다.

장도빈은 평안남도 중화군 출생으로, 어려서 재야 유림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1902년 한성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교 전신)로 유학해 신학문과 접하게 된다. 1908년에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 야간 법과에 입학했다.

1909년에는 개화사상가로 이름 높던 박은식(1859~1925·백암)의 소개로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가 되었다.

장도빈은 논설주필이던 신채호와 주경야독하며 교대로 신문 사설을 썼다. 선배 기자이자 역사가였던 신채호와의 만남은 그를 국사 연구의 광활한 무대로 이끌었다. 신채호는 언론인으로서 역사 사론을 주로 집필하며 단군조선을 기원으로 하는 한민족 대륙역사설을 주창하고 있었다.

장도빈 역시 ‘민족경쟁의 최후 승리’ 등 역사의식이 투철한 다수의 사설을 게재하며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우수리스크에서 망명 논객 장도빈은 한국사 교재를 만들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유적을 수시로 답사했다. 발해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 이후 사실상 최초였다. 중국 지방사로 취급되던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한 유득공 이후 한국사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조시대로 기술하게 된다.

장도빈 또한 “일본의 침략으로 무너진 조선민족은 대륙 역사의 주체로 반드시 부활한다”는 지론을 펼쳤다.

우수리스크 청나라 거북 석상, 한·중·러의 역사 격전장

장도빈은 1916년 귀국 후 민족의 혼을 발굴하고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제2단계 역사전쟁에 돌입한다. 그는 고구려·발해 역사를 집대성한 <국사>를 발간하고, 출판사를 세워 국사를 보급하는 활동에 몰두했다.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은 1932년부터 동아일보에 66회에 걸쳐 연재한 ‘조선사’를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장도빈은 <조선영웅전>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사상가·군인·혁명가·척식가(개척자) 등 분야별 인물 52명을 선정해 기술한 대저술가이기도 했다.

10대 혁명가 가운데 그는 울릉도를 지켜낸 안용복, 서북의 혁명가 홍경래, 동학의 최제우와 전봉준 등을 영웅으로 꼽았다. 그의 혁신적 역사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한 <조선위인전>에서는 위인·식산가(기업가)·교육가·발명가·예술가 등 58명의 인물사를 소개했다. 그는 고구려의 동명왕(주몽),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연개소문, 발해 태조, 강감찬, 이순신 등을 특히 추앙했다. 국난 극복의 위인과 대륙의 기상을 계승한 고구려·발해 인물들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1940년대 그는 일제와의 타협을 피하기 위해 평안도 산골 등지에 은신하며, 식민지 조선의 저명인사 다수가 연루된 이른바 ‘친일 반민족행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해방 후에는 민족주의 계열 언론인들과 함께 <민중일보>를 창간했고, 독립운동가 장형(1889~1964), 조희재 등과 함께 단국대학(檀國大學)을 설립해 학장을 맡으며 민족교육을 실천했다. 그가 명명한 ‘단국대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단군(檀君)을 상징화한 장도빈의 민족의식을 보여준다. 장도빈은 1960년 건국문화훈장을 받았고, 사후인 199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역사는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히 이어진다. 장도빈의 아들 가운데 장치혁이라는 인물이 있다. 부친을 따라 월남한 장치혁은 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는 육군 장교로 지원해 복무한 뒤 전역했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거쳐 무역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는 고려합섬(高麗合纖)이라는 섬유회사를 창업해 고합그룹으로 발전시켰고, 한때 재계 16위의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여기서 ‘고려’라는 명칭은 고구려 역사정신의 후계자이자 부친 장도빈의 사상을 상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장치혁은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부친의 평생 업적이었던 고구려·발해 역사 연구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 자신도 연해주를 방문해 부친의 역사기행지를 답사했다.

고합그룹 블라디보스토크 지사는 연해주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교수와 연구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풍운의 기업인 장치혁

장치혁은 부친으로부터 대륙의 역사정신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1990년대 한러수교와 한중수교의 막후 협상을 지원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디딤돌 역할도 했다. 그러나 대륙의 꿈과 대망을 품었던 고합그룹은 IMF 사태 속에서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평안북도 영변 출생의 장치혁에게서 우리는 부친 장도빈의 역사전쟁 계승자로서, 한국인에게 내재한 대륙 역사의 장대한 일면을 발견하게 된다. 대륙으로 가는 길에 장도빈과 장치혁이 있었다.

우수리스크 수이푼강은 오늘도 북만주와 연해주의 역사를 품고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우리가 방문한 수이푼강(수분하·라즈돌나야·추풍) 우수리스크 유역은 한민족의 고대국가 발해의 영토로, 중요한 도성이 존재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이 발해의 고토이며 한민족의 혼이 깃든 역사적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언제 알려졌으며, 이를 밝혀낸 인물은 누구였을까? 이 역사적 사실을 찾기 위해 우리는 구한말 망국의 역사를 다시 되짚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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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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