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창녕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한국전쟁 참전 美 해병 러스터…팔을 잃고도 산을 오른 사람

한국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러스터 해병대원이 미국으로 귀국한 뒤, 한국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직접 그려 덧붙인 엠블럼. <사진 황건>

한 팔의 사나이는 아직도 산을 오르고 있었다. 창녕 박진전쟁기념관에서 만난 미 해병 러스터씨 이야기다.

지난주 경남 창녕에 있는 박진전쟁기념관을 찾았다. 낙동강 방어선의 치열했던 전투를 기억하는 작은 공간이었다. 전쟁기념관은 대개 숫자와 지명, 부대명과 전투 경과를 말해준다. 그러나 때로는 전시장의 한쪽 구석에서 이름 없는 물건 하나가 전쟁의 본질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그날 내 발길을 붙든 것은 총도 군복도 아니었다. 한 장의 편지와 짧은 그림이었다.

전시 패널에는 러스터(H. Luster)라는 미 해병대원의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창녕 대봉리 일대 전투에서 기관총 사수로서 적과 교전하다가 오른팔을 잃었다고 한다. 전쟁은 젊은 병사의 팔 하나를 앗아갔지만, 그의 삶까지 가져가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미국에서 사격 코치로 살았다. 오른팔을 잃은 사람이 사격 코치가 되었다는 사실은 짧은 문장 하나로 지나칠 일이 아니다. 상실을 기능으로, 절망을 숙련으로 바꾸어 낸 인간 의지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오래 붙잡은 것은 그의 이력보다 편지 속 작은 낙서였다. 거기에는 한 팔만 가진 사람이 총을 들고 산을 오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투박한 선 몇 개로 그린 단순한 그림이었다. 산봉우리 옆에는 12,000피트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 산의 높이였는지, 상징적인 숫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오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상처를 감추려 한다. 잃어버린 신체를 부끄러워하고, 지나간 전쟁을 잊으려 한다. 그러나 러스터 씨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결핍된 사람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 팔로 총을 들고 험한 산을 오르는 존재로 남겼다. 상처를 훈장처럼 드러낸 것이다.

전쟁기념관에는 종종 영웅담이 넘친다. 누가 어느 고지를 점령했고, 어떤 부대가 얼마나 버텼는지가 기록된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성은 이런 작은 그림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실을 연민이 아니라 존엄으로 바꾸어 낸 사람. 그것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형외과 의사로서 상처 입은 얼굴과 몸을 많이 보아왔다. 사람들은 흉터를 지우고 싶어 한다. 당연한 마음이다. 하지만 어떤 흉터는 지워야 할 흔적이 아니라, 살아남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러스터 씨의 한 팔은 단순한 장애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을 견디고 이후의 삶까지 다시 세운 이력서였다.

그는 생전에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고 한다. 오른팔을 잃은 땅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찾았다. 여러 차례 창녕을 방문하며 대봉리 고지를 걸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잃어버린 팔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팔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젊은 날의 자신을 만나러 왔을 것이다. 포연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한 청년을.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을 통과한 사람들의 시간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남은 생애 동안 저마다의 산을 오른다. 어떤 이는 악몽을 견디고, 어떤 이는 통증을 견디며, 어떤 이는 잃어버린 몸으로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

러스터 씨 역시 그 산을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편지 한 귀퉁이에 자신의 모습을 남겼다. 한 팔의 사나이가 총을 들고 산을 오르는 그림. 그것은 낙서가 아니라 자화상이었다. 패배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지난주 창녕의 작은 전시관에서 나는 오래된 전쟁의 한 장면보다 한 인간의 품위를 보았다. 한 팔의 사나이는 아직도 산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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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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