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웅전 전 의원(사진 왼쪽) 별세 소식을 지난 23일 밤 접하며, 25년 전인 2000년에 있었던 한 비화(秘話)가 떠올랐다. 이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터라 더욱 그렇다.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던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실의 두 비서관 김대곤·김성진은 각각 3년 전과 올해 초에 작고했다. 그 결과 당시 책임 있는 직위에 있던 사람 중에는 박선숙 비서관(후일 공보수석)과 필자 정도만 남아 있다. 이 비화는 김대중 대통령이 자서전에 구술하지도 않았고, 평전 저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역사적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DJP 연합’이라는 정치적 조어(造語)는 바로 변웅전 씨의 작품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네 번째 대선 도전이던 1997년 승리를 위해 JP와 손을 잡았다. 당시 자민련 의석수는 17석에 불과했지만, DJ는 JP의 지지와 의석 없이는 정권교체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 가지 큰 약속을 JP에게 제안했다. 하나는 집권 시 내각 구성에서 JP에게 1대 1의 대등한 조각권을 보장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임기 내 의원내각제 도입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의원내각제 도입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DJ는 적어도 내각 구성권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JP와의 약속을 지켰다. 이 때문에 DJ 정부 초반부터 중반까지 경제 수장과 주요 경제부처 장관 상당수는 JP가 천거한 인사들로 채워졌다. 진념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이규성 초대 재경부 장관(후일 부총리), 이헌재 재경부 장관, 이정무·오장섭·김용채 건설부 장관, 이건춘·임인택 교통부 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 충청권 인사 비중이 높았던 것은 JP의 정치적 기반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DJ는 개인적으로 탐탁지 않더라도 JP가 천거한 인사라면 웬만하면 수용하려 했다. 극히 일부 수용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정중히 사양했다. JP가 총리를 맡았던 1년 10개월 동안 그의 장관 추천이 거절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JP가 비광으로 오광을 판다”는 말까지 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JP의 인재풀과 자민련의 인적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청와대 내부에서도 추천 인사의 질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졌다.
### ■ 2000년 3차 개각에서 벌어진 일
문제의 사건은 이러한 분위기가 무르익던 2000년 8월, 이른바 DJ의 ‘3차 개각’ 과정에서 발생했다. 통상적인 절차대로 DJ는 개각 대상 부처 명단을 JP에게 전달하며 적임자 추천을 요청했다. 그때 JP가 경제부처 장관 후보자로 추천한 인물 중에 변웅전 씨(당시 60세)와 계룡건설 창업자이자 전직 의원 이인구 씨(당시 68세)가 포함돼 있었다. 당시 DJ는 여름휴가로 청남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추천 명단을 접한 공보수석비서관실 내부에서는 말은 아끼면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공감대가 순식간에 형성됐다. 다섯 명의 비서관이 즉시 회의에 들어갔다. 결론은 명확했다. 아무리 JP의 장관 추천권을 존중한다 해도, 이 정도 인사까지 수용하면 국정 운영의 신뢰가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당시 74세의 노정객 JP는 장관 추천 과정에서 재력가를 챙기며 정치자금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비서관들은 두 사람의 임명을 막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며 최소한의 공정성을 지키는 일이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였다. 논의 끝에 필자가 책임을 맡아 대응책을 마련하고, 나머지 비서관들이 이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 시기 공보수석비서관실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던 방식은 주요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한 비공식 여론조사였다. 토요일이던 그날, 우리는 각 언론사의 편집국장, 정치·경제부장, 청와대 출입기자 등 30~40명을 대상으로 두 후보자의 실명을 밝히고 경제장관으로서 적합한지 의견을 물었다. 결과는 거의 ‘100% 부적합’이었다.
다음 단계는 대통령이 즉시 검토할 수 있도록 보고서를 정리해 청남대로 보내는 일이었다. 우리는 속도를 냈고, DJ는 보고서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다음 주 발표된 개각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빠졌다. DJ는 언론의 평가를 중시하는 지도자였기에 이 같은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글을 빌려 당시 공보수석비서관실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주신 DJ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 ■ 기록을 남기는 이유
이 글은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유가족에게 누를 끼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고자 할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변웅전 씨를 장관직 부적합으로 판단한 이유는 여러 정황이 결합된 결과였다. 그는 유명 아나운서였지만, 퇴직 후 방송사 내부에서 제기된 여성 아나운서들의 문제 제기,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과 일하며 불거진 각종 구설 등이 모두 작용했다. 이인구 전 회장의 경우 계룡건설을 훌륭히 키운 기업가였지만, 전문성이 중시되는 경제 장관직 수행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이인구 전 회장은 2017년 85세로 세상을 떠났고, JP는 2018년 92세로 별세했다. 그리고 이제 변웅전 씨도 작고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셈이다.
‘MBC 명랑운동회’를 진행하던 키 크고 잘생긴 아나운서 변웅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JP와 같은 충남 서산 출신으로 지역구에서 3선을 지냈고, 18대 국회에서는 보건복지가족위원장까지 역임했다. 정치인으로서 결코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그가 장관으로 임명되지 못한 데 우리 보고서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인간적으로 미안함이 없지 않지만,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확신은 변함없다.
구설과 평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인물이지만, 방송인·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나름의 공헌을 했던 변웅전 님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