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헌 선생은 1965년 소설가 남정현의 소설 ‘분지(糞地) 필화사건’ 무료 변론을 시작으로, 이 나라 질곡(桎梏)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사건의 억울한 피고인들을 변론했다. 다 거명하기도 힘들다. 통일혁명당 사건,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 민청학련 사건, 김지하 ‘오적(五賊)’ 사건, 인혁당 사건, 전두환 피해자 양심수 사건, 민중교육지 사건, 인천 5·3 사건, 임수경·문익환·황석영 방북(訪北)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그리고 납치 사건 등 김대중 대통령 관련한 모든 사건까지.
한 변호사에 대한 회억에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인들이 ‘한 변호사가 변호한 사람치고 징역 안 간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요’라고 농담하면 선생은 ‘맞아. 그런데 징역 가면서도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 안 한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시오’라며 유쾌하게 웃으시곤 했다”는 삽화를 꺼냈다.

선생은 평생 두 번 옥고를 치르셨는데, 1975년의 첫 옥고는 좀 자랑스러워하는 감옥살이였다. 당시 ‘유럽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된 김규남 의원과 관련해 <여성동아>에 ‘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서 – 어떤 조사(弔辭)’라는 글을 썼다. 선생은 반공법으로 구속됐고 감옥에 갔다. 재판에 무려 129명의 변호사가 무료 변론에 나서 화제가 됐다. 8개월여 감옥 생활 후 집행유예를 받았지만 8년 5개월간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었다. 2017년 6월 한 선생은 재심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42년 만이었다. 선생은 “늦어빠진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며 “권력자에 의한 사법농단이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는 국가의 사법 폭력이다”라고 일갈(一喝)했다.
그는 1961년 시집 ‘인간귀향’을 시작으로 시집(4권), 수필집, 수상집, 법조 관련 전문 서적, 변호사 일대기, 저작권 전문서, 유머집, 심지어는 ‘그 남자 문재인’(2012, 공저)이라는 책까지 종횡무진 분야를 넘나들며 47권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은 언제나 바른 길, 정의로운 길, 정직한 길만 가고자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홍성우 변호사 등과 함께 1988년 ‘민변’(民辯·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자였다. 현 민변의 간판이 한승헌 선생 글씨이고, 민변에는 ‘한승헌 서가’도 있다. 평소 한 선생은 후배 변호사들에게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변호사는 당연히 인권의 보루인데, 인권변호사는 마치 ‘역전 앞’이나 ‘수영 잘하는 수영선수’처럼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는 민변 후배들에게 “사서 고생하는 변호사가 되자”고 당부했다. 1천 명이 넘는 민변 변호사들은 지금도 모임이나 회식이 있을 때 공식 구호가 “사서 고생하는 변호사가 되자”이다.
한 변호사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발기인과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도 맡았다. 1973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 주역인 박형규 목사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또 기독교 신자가 된 선생이 김대중 정부 때 감사원장을 맡게 되는 과정에서, 인격 고매한 어른들의 유머 향연이 황홀하게 펼쳐진다. ‘부활절 예배 사건’ 변론 때 선생은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데, 무기가 찬송가와 성경뿐이다. 말이 되느냐”고 공박해 검찰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고 박권상 전 동아일보 주필(전 KBS 사장)과 함께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공천을 준다 해도 절대 받지 않아 김대중 선생을 속상하게 했던 산민 선생이 1998년 3월 청와대로 간다. DJ가 묻는다.

“한 변, 교회 다니지요?”
“예, 신자이긴 한데 사이비죠. 가다 말다 그럽니다.”
“어떻든 크리스천들의 3계명이 있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알지요?”
“예, 알긴 합니다만…”
“그럼 됐어요. 감사원장 하세요. 그럼 날마다 ‘감사’하게 되지 않겠어요?”
한 선생의 후일담에 따르면 DJ가 그렇게 치고 나오는데 달리 반박을 못하겠더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기습공격, 반칙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감사원장이 됐다. 63세에 평생 처음 맡는 전무후무한 관직이었다. 정작 일하면서 보니 정부 주요 공직자의 연령 제한이 70세인데 감사원장만 65세로 되어 있었다. 선생은 정부·국회와 협력해서 이를 70세로 바꾸었다. 대다수 지인들은 당연히 선생도 새 조항에 따라 임기(4년)를 다 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은 이 수정 조항의 부칙에 “현재 재임하는 원장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적시해 버렸다. 그리하여 감사원장 임기의 절반도 안 되는 1년 6개월만 재임하고, 1999년 9월 말 만 65세에 표표히 퇴임했다. 감사원장 취임 때 신고한 재산총액은 8억2천만원. 이런 어른 또 보셨나?
선생은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매년 원단(元旦)이면 지인들에게 사자성어를 보내주셨다. 2009년의 ‘정관자오(靜觀自悟·조용히 바라보며 스스로 깨우친다)’ 등 여러 개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날 한 선생의 전북 진안 고향 후배로 선생을 추억한 김선수 전 대법관(64)도 “대법관이 됐을 때 선생께서 ‘도비고원(道非高遠·도는 높은 곳이나 먼 곳에 있지 않다)’이 새겨진 필통을 주셔서 지금도 갖고 있다”고 회고했다.
고향을 사랑하셔서 ‘전북 출신 민주화동우회’인 전민동(全民同) 창립회원이셨다. ‘재경(在京) 전북도민회’ 명예회장이셨고, 언론인 후배들을 아끼셔서 1988년 창립된 전언회(全言會·전북 출신 언론인 모임)의 명예회원을 평생 맡아주셨다. 선생은 가끔 후배들을 죽비로 때리셨다. 한 번은 전언회 모임에서 “전언회의 전(全)을 전주고·전북의 ‘전’이 아니라 ‘온전한 전’으로 해석해서 온전하고 충실한 모임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1993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와 선생을 식사에 모셨다. “선생님, 전 41살이니 아직 젊습니다”라고 했더니 “이 사람아, 어찌 젊나?” 하셨다. 바짝 긴장했더니 “자네는 젊은 게 아니라 어리지”라고 촌철살인으로 말씀해주시던 선생이 그립다.
사족(蛇足) 같은 얘기 하나 더 하자. 서울대 출신인 한 후배가 어느 날 필자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한승헌 변호사님, 고향 선배에 고교 선배 되시죠?” “그러네만.” “근데 그분이 전북대 졸업했던데요? 전 당연히 서울법대 출신인 줄…”
여기까지 말하다 그 후배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되게 혼났다. “서울대 아니면 학교로 알지 않는 속물근성 꽉 찬 놈 같으니. 그래, 전북대 맞다. 그런데 변호사님은 전주고 30회 수석 졸업생이다. 고향(전북 진안)에 홀로 계신 모친께서 편찮으셨고, 아들이 가까운 데 있기를 바라셔서 전북대에 진학했다. 그것도 법대가 아니라 정치학과였어. 그 썩을 놈의 학교로 사람 판별하는 짓거리 그만 해라, 이놈아.” 그 후배는 “사람이 절대 길러서는 안 되는 두 마리 개가 있으니, ‘편견’과 ‘선입견’이다”라는 설교도 들어야 했다.
한 선생은 당신 자신에게는 “부끄럽지 말자”는 말을 자주 하며 자계(自戒)에 힘쓰셨다. 후배들에게는 “입신(立身)에 멈추지 말고 헌신하자”라는 말을 가장 강조하셨다. 시대의 큰 스승, 진정한 양심, 닮고 싶은 진본 어르신이 떠나셨다. 선생님이 남기신 ‘인간 향훈 가득한 변호사’의 길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2022년의 한승헌 변호사 추도식 추억.
70 평생, 그런 추도식은 처음이었다. 추도식장에 박장대소가 터지는가 하면, 가슴을 찢는 장사익의 노래가 퍼지고, 어느 순간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들려온다. 2022년 4월 24일 오후 5시, 강남성모병원 예식실에서 거행된 추도식에 갈 때만 해도 평생 처음 보는 진기한 추모 행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기야 처음부터 좀 수상하기는 했다. 추도식 장소가 병원 장례식장 ‘예식실’이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 예식실이 웬 말?” 그건 마치 ‘신생아실 옆의 장례식장’처럼 좀 괴이하지 않은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안내인에게 물었다. “장례식장에서 결혼을 하기도 합니까?” 그는 큰 웃음을 터뜨리더니 “신부님이 고인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는 방을 예식실이라 합니다”라고 친절히 답해주었다.
날 좋은 봄날 늦은 오후의 추도식은 적절한 긴장감과 ‘오마이TV’의 생방송이 내는 약한 기계음 속에 잘 진행되었다. 전문 연출가가 기획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추도식에 등장하는 면면도 훌륭했다. 특히 추도사를 여러 명이 계속하면 지리할 것까지 고려해, 추도사를 두 분이 한 뒤 추모시 낭송과 장사익 현장 노래를 넣고 다시 두 분 추모사를 듣게 하는 기획력은 지금까지 본 추도식 중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압권이었다.
상임 장례위원장 함세웅 신부님(당시 80)은 “검찰 제도 개혁 논쟁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변호사님의 삶이 확실한 대안이라고 믿는다. 상식을 잃어버린 시대, 변호사님의 빈 공간이 더욱 아쉽다”는 말씀으로 추도사를 맺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