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압제에서 해방된 직후인 기원전 450년에서 425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약성서 역대기상(上)에 ‘야베스의 기도’가 단 두 절로 짧게 나타난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존경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고, 지역을 넓혀 주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불행을 막아 주소서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이루어 주셨다.”(역대기상 4:9~10)
이 짧은 기도는 행복에 굶주리고 형통에 목마른 크리스천들에게 마치 ‘축복의 코드’처럼, 가뭄에 단비처럼 다가왔다. 종교잡지 편집인인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은 이 기도를 축복, 영토의 확장, 인도하는 손, 불행으로부터의 보호 등 네 부분으로 분석하고 ‘축복을 이끌어오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현대 신자들의 감성과 소원에 익숙한 대중적 목회자들도 이 기도를 좋은 설교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런데 종교학자 제프리 마한(Jeffrey H. Mahan)은 이런 현상이 ‘기도를 자기중심적 욕망의 충족 수단으로 잘못 쓰는 나르시시즘의 기복(祈福) 신앙’이라고 비판한다. 야베스의 기도가 ‘축복을 자동적으로 생산해 내는 주문(呪文)’인 것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기복 신앙은 성화(聖化)보다 성공과 풍요와 번영을 바라는 종교적 일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최고경영자’로, 성령을 ‘기적의 주술(呪術)’로 탈바꿈시키는 뒤틀린 종교현상이다.
행복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무릇 육신을 입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고통과의 투쟁이나 다름없다. 인생고해(人生苦海)라, 그 고통의 현실을 무시하고 기복이나 형통을 천박하다고 업신여기는 종교는 허공에 떴다가 사라지는 뜬구름처럼 허망한 환상,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는 관념적 사유(思惟)에 불과하다.
성서는 고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불렀고(창세기 12:2), 시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된다(시편 1:1). 예수도 산상수훈에서 8복을 말씀했다(마태복음 5, 누가복음 6). 그런데 여기의 복은 물질적 풍요나 외형적인 행복(happiness, ευτυχία)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누리는 은총(blessing, μακάριοι)이다.
“예수의 8복은 단지 축복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보여 준 삶의 방식이다.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제자도(弟子道)의 길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Nachfolge)라는 책에서 밝힌 신앙고백이다.
성서는 바알 우상숭배를 가장 경계한다. 농업 공동체인 가나안의 토착신이자 문명국 이집트의 신 바알은 생산, 풍요, 성장의 물신(物神)이다. “네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네 모든 일이 잘되고 네가 건강하기를 빈다”는 기원(요한3서 1:2)을 근거로 이른바 ‘3박자 구원론’이라는 설교까지 생겨났지만, 사도 요한의 기원은 바알 신앙처럼 행복의 시혜(施惠)를 약속한 것이 아니다. ‘신자의 삶이 실제로는 매우 어렵고 곤핍한 현실’을 전제로 한 소망이다.
형통, 평안, 건강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나 평생을 매 맞고 쫓겨 다닌 사도 바울의 고난에 찬 삶은 모두 비신앙적인 삶 또는 실패한 삶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고했다.(디모데후서 1:8)
예수는 선언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마태복음 6:33) 이 모든 것이란 먹고 입고 마시는 것, 곧 야베스의 기도에 올라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 모든 것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공의로운 다스림을 소망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야베스의 기도를 다시 읽는다. 개인의 행복을 간구하는 이기적 기도가 아니다. 야베스는 ‘자기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의 어머니가 ‘고통을 겪으며 그를 낳았다’는 것은 그가 바벨론 포로 시기의 고난 중에 태어났다는 뜻이고, ‘형제들보다 존경받았다’는 것은 민족 공동체의 존경받는 지도자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복에 복을 더하사’는 물질적 번영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 이르는 전인격적 은총을, ‘지역을 넓혀 주소서’는 빼앗긴 땅 가나안의 회복을, ‘불행을 막아 주소서’는 고난 속의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평강을 갈구하는 기원이라고 보아 큰 잘못이 없을 터이다.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문에는 ‘내 기도’가 없다. 모두 ‘우리 기도’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남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예수의 기도는 개인의 기도가 아니다. 공동체의 기도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이루어 주셨다.”고 증언한다. 자신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동일시한 야베스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도 합치되었다는 의미다. 안팎으로 큰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는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야베스의 공동체를 위한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원이 되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