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이우근 칼럼] 예수의 부활, 역사 논쟁을 넘어 실존의 증언으로

도마의 불신(카라바조 작)

4월은 부활절이 있는 달이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라”는 분부를 남겼다(사도행전 1:8). 그 말씀에 따라 역사상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왔고, 지금도 증언하고 있다. 예수가 불멸의 신(神)이라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예수가 인간이라면, 어떻게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가?

소송법에 증인적격(證人適格)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건의 핵심내용을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만이 증인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남에게서 전해들은 말을 옮기는 전문증거(傳聞證據)는 독자적인 증거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증언하는 것은 위증이다.​

사랑과 양심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우리들 삶 속에 엄연히 살아서 움직인다. 어떤 진화론으로도 아메바에서 사랑의 희생을, 아미노산에서 양심의 가책을 추출해내지 못한다. 화학공식으로 증명될 수 없는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도, 밤새워 번민하는 죄인의 양심도 모두 ‘조작된 환상’인가? 증명되지 않는 화학공식, 수학공식은 아직도 적지 않지만 그 공식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부활의 증언은 경험한 사실(fact)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초월적 체험의 진실(Truth)을 증언하는 것이다. 증인이라는 헬라어 마르튀르(μαρτυρ)는 영어의 순교자를 뜻하는 마터(martyr)의 어원이 되었다. 증인은 그 체험한 진실을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9) 부활은 예수에게만 특유한 사건이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보편적 사건이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모두 부활한다. 부활은 교리나 신조(信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문제’라는 가르침이다.

실존(existence)은 ‘밖에(ex) 있다(ist)’는 뜻이다. 현존재의 밖, 삶과 죽음의 바깥, 곧 부활과 내세의 소망을 품은 의미로도 새길 수 있겠다.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을 향한 예수의 고백이었다면, 부활의 은총은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 하나님은 누구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마가복음 12:26,27) 예수의 이 말씀은 현재시제(現在時制)로 되어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던 분’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 곧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만나는 영(靈)이라는 뜻이다(요한복음 4:24)

갈릴리 호숫가의 아침, 부활한 예수가 아직 죽지도 않은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는다(요한복음 21:10~13). 죽음 건너편의 부활은 바로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우리의 현존재(現存在)와 더불어 있다.

​예수의 몸은 닫힌 문을 열지 않고 방 안으로 쑥 들어갈 수 있었고(요한복음 20:19),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그 먼 거리를 마치 축지법 쓰듯 순식간에 왕래할 수 있었다(마태복음 28:7∼10).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적,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생선 따위를 먹지 않을 뿐더러, 굳이 불에 굽는 문화적 취사방법을 동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순수한 영혼이라면 못 자국이나 상처의 흔적을 지니고 있지 않겠지만, 부활한 예수의 몸에는 못과 창 자국이 뚜렷이 남아있었다. 부활한 예수는 순수한 영혼도, 순수한 육체도 아닌 ‘영적 육체'(spiritual body), 영과 육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영육불이(靈肉不二)의 전인격(全人格), 곧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아닐까.

​예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모든 가르침을 들었던 제자 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다. 예수의 몸에 남아있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본 뒤에야 그의 부활을 믿게 된 도마는 예수를 ‘나의 하나님'(ὁ θεός μου)이라고 고백한 최초의 사도가 되었다(요한복음 20:28).

부활은 환상이나 신조가 아니다. 삶이요, 인격이며, 실존이다. 혀끝에서 찰랑거리는 말의 수면(水面)을 뚫고 깊디깊은 인격의 심연(深淵)으로 다가가야 한다. 교회에서 들어온 대로, 신학교에서 배워온 대로 부활의 교리를 앵무새처럼 되뇌이기만 하는 것은 부활의 참된 증언이 아니다. 부활의 진실은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다.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그의 부활을 경험한 적도 없는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 실존적인 회심을 체험한다. 소송법적인 증인적격은 없었지만, 영적인 증인적격을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2천여 년 전 한 유대인 사형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진실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진실의 증인적격을 갖추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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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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