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교황이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들어올 때, 의전을 맡은 사람이 불타는 아마(亞麻) 조각이 달린 은색 갈대를 들고 슬픈 목소리로 세 번 외친다. “세상의 영광은 이처럼 덧없이 지나가리라(Sic transit gloria mundi).” 갓 즉위한 교황에게 ‘종교권력 최정상의 자리도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주는 겸손의 가르침이다.
12세기에 시작된 이 의식은 1963년 바오로 6세의 즉위식 때까지 수백 년 동안 이어져왔다. 지금은 로마 교구장의 착좌식(着座式)으로 진행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마의 장군이 마차를 타고 개선행진을 할 때, 장군 뒤에서 노예가 줄곧 속삭인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또는 “뒤를 돌아보라. 너는 인간일 뿐이다!(Respice post te! Hominem te esse!)”라는 말을 되뇌었다고도 한다.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개선장군에게 ‘너도 죽을 인간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깨우쳐주는 경구(警句)였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Sein zum Tode)’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나날을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죽을 수 없다. 부(富)나 권력이나 명예도 덧없이 사라진다. 가장 확실하게 다가오는 유일한 가능성은 죽음이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인간은 불안을 느끼면서도 일상적 망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된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유한한 현존재(現存在)인 인간이 비본래적 일상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아(自我)로 살아가게 하는 필수조건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삶에 의미를 주는 ’죽음에로의 선구‘(Vorlaufen in den Tod)라고 불렀다.
메멘토 모리는 서글픈 경고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삶의 깨달음이다. 1세기 튀르키에의 노예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죽음의 기억이 자유를 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죽음은 불가피한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인식할 때 도리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타인의 평가나 불확실한 미래에 휘둘리지 않고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겠다.
바로크 미술에서는 죽은 사람의 해골이 인간의 유한함과 삶의 허무(虛無, Vanitas)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 헨리 8세의 왕실 화가가 된 한스 홀바인 2세(Hans Holbein the Younger)는 <대사들>(The Ambassadors)라는 명화를 남겼는데, 그림 밑 부분에 기괴하게 굴절된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선뜻 알아보기 어려운 그 이미지는 길쭉한 사람의 해골이다. 젊음과 권력, 부와 지식을 거머쥔 대사들도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운명의 필연을 나타낸 일그러진 왜상(歪像, Anamorphosis), 인생의 덧없음과 겸손을 깨우치는 메멘토 모리의 메시지다.
그런데 종교는 메멘토 모리를 뛰어넘는다. 죽음을 넘어 그 뒤를 바라본다. 불교는 해탈과 나락(奈落)으로, 그리스신화는 천상의 엘리시움(Elysium)과 지하의 타르타로스(Tartarus)로, 기독교는 천국과 지옥으로 죽음 너머의 영생과 고통를 응시한다. 그 영생과 고통은 죽음 이전 곧 이승에서의 삶으로 결정되는 인과율(因果律)의 지배 아래 있다.
종교가 보는 죽음은 삶의 소멸이 아니다. 죽음은 연속된 삶의 한 과정이다. 죽음 이전의 삶, 지금의 마음, 오늘의 행실이 죽음 너머의 세계로 건너간다. 성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신의 섭리와 은총에 따른다고 보는 점에서 독특성을 지니지만, 그 섭리와 은총도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보응(報應) 또는 용서와 구원일 터인즉 죽음 이전과 이후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사람은 흙으로 빚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구약성서의 선언(창세기 3장 9절)은 죽음이 특별한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조라고 보는 점에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와 맥을 같이 한다..
나아가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는 신약성서의 전망(히브리서 9장 27절)은 죽음의 기억을 넘어 죽음 이후의 삶으로 이어지는 신앙윤리의 핵심을 드러낸다. 메멘토 모리는 그렇게 ‘죽음의 기억’에서 더 나아가 ‘죽음 너머의 삶’을 내다본다.
누군가 말했다. ‘죽음은 위대한 평등주의자'(Death is the grand leveler.)라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렇지만 죽음은 인생의 손실이 아니다. “삶의 가장 큰 손실은 이승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내면에서 스스로 죽어가는 것이다.” 언론인이자 대학교수인 노먼 커즌스(Norman Cousins)의 성찰이다.
내면의 죽어감을 멈추는 것은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 삶에서 죽음 너머를 바라보는 것, 삶이 죽음과 어깨를 겹고 함께 걸어가는 것, 곧 메멘토 모리다. 메멘토 모리는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생명의 숨결을 내뿜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