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신간비평] 전해수 평론가 “김시림 ‘나팔고둥좌표’..이름 없는 생명에 말을 건네다”

김시림 시인은 세상의 주변부에서 울리는 미세한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의 시는 그들을 위한 ‘말 건넴’이자, 존재 자체에 대한 조용한 예찬이다.

[아시아엔=전해수 문학평론가] 김시림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나팔고둥 좌표』(2025)는 삶의 주변부에 위치한 약자들의 내면과 작은 생명체들을 향한 섬세한 시선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시인은 하찮고 여린 존재들에게 주목하면서도 삶의 진실을 포착하고 동참하는 시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는 생명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교차하며, ‘생명성’이라는 주제 의식이 응축되어 있다.

1. 수직의 몸짓-작은 생명에 담긴 철학

「수직의 몸짓」은 밤나무 잎을 먹다 실수로 몸이 빠진 자벌레를 묘사하며 시작된다. 자벌레는 스스로 뽑은 실오라기로 수직 낙하를 막고 제자리로 돌아가려 발버둥친다. 그 모습은 위태로우면서도 생에 대한 절박한 의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구절 “방하착 放下著, 참 어렵나 봅니다”는 불교적 사유를 끌어와 ‘놓음’과 ‘버림’의 어려움을 환기한다.

시인은 자벌레의 몸짓에서 생명의 본능, 애씀, 그리고 집착을 동시에 읽어낸다. 미물에 불과한 자벌레의 한 줄기 실오라기에서조차 삶을 향한 강한 끈기를 발견하며, 이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응시한다.

2. 나팔고둥 좌표-느리고 더딘 희망의 한 걸음

표제시 「나팔고둥 좌표」는 병원 로비의 수족관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물들과 병실 112호 환자의 삶을 병치하여 묘사한다. 시인은 미세한 생물의 움직임을 통해 생명의 위태로움과 한 줄기 희망을 동시에 포착한다.

작은 나팔고둥이 “한 뼘쯤 옮겨 앉은” 변화는 병상의 환자에게도 희망의 좌표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은 더딘 한 걸음, 거의 보이지 않는 변화조차 생명에 대한 긍정으로 해석하며, 독자에게도 조용한 감동을 선사한다.

3. 러브버그-해충과 익충 사이, 사랑을 기억하다

「러브버그」는 흔히 해충으로 분류되는 붉은등우단털파리를 다룬다. 암수 한 쌍이 꼬리를 맞대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해충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짝’으로 재조명된다. 시인은 해충과 익충,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의 이분법을 넘어 생명과 공존, 그리고 사랑의 가치에 주목한다.

생물학자가 “공존의 대상으로 보라”고 한 말을 빌려, 시인은 이 작은 생명체의 존재 또한 ‘사랑’의 이름으로 의미화하며, 우리가 잊고 있던 감정의 회복을 촉구한다.

4. 대흥사 가는 길목에서-생의 이별과 순리

「대흥사 가는 길목에서」는 생을 다한 동백꽃들이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통해, 삶과 이별을 조용히 성찰한다. “살아오는 동안 / 내가 품었다가 / 혹은 나를 품었다가 / 떠나가던 이별”이라는 구절은 시인의 개인적 체험이자 보편적 감정으로 확장된다.

시인은 꽃송이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는다. 그것이 이별의 메타포가 되고, 더 나아가 ‘자연의 순환’과 ‘생명성의 끝자락’을 담아내는 시적 장치가 된다.

5. 물결-생명은 맞닿는 흐름

마지막 시 「물결」은 “살과 살 꼭 맞대고 흐르는 강물”의 이미지를 통해, 생명이란 서로 닿고 흘러가는 관계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임을 시적으로 그려낸다. “한 번 놓치면 / 영영 멀어져”라는 구절은 삶과 사랑, 이별과 연민이 얽힌 인간사의 본질을 잔물결처럼 은은히 전한다.

요약하며

김시림의 시는 미세한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삶을 포기하지 않는 연민의 눈으로 가득하다. 자벌레, 나팔고둥, 붉은등우단털파리, 동백꽃 등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대상들은 모두 존재의 끝자락에서 사랑과 삶을 외친다.

이처럼 작고 여린 생명들의 감정에 응답하는 김시림의 시는, 생명을 하나의 철학으로 끌어올리며 독자로 하여금 ‘사랑과 연민의 이중주’를 공명하게 만든다. 그의 시에서 ‘생명’은 단순한 소재가 아닌, 시인이 관통해온 세계관이자 시적 태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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