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와 겹친 홍콩 정월대보름
*홍콩에 거주하는 라이프코칭 컨설턴트 베로니카 리(Veronica H. Lee)씨가 홍콩의 정월대보름?풍경을 사진과 함께 전해왔습니다. -아시아엔(The AsiaN)
축제 유감(祝祭 有感)
매주 한번씩 가는 집 근처 꽃집에 들렀다. 국화나 수선화같은 춘절 꽃에 질린 두 눈이 장미를 원했기 때문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장미가 색깔별로 보관된 냉장고로 직행해 내 집 냉장고 열듯 머리를 들이민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꽃집에 장미가 하나도 없다니!’ 표정을 본 주인이 중국인 특유의 느긋한 투로 말했다. “지금 장미 가격이 너무 올라가서 아예 안 들여놨어요. 저렴하고 잘 나가는 국화나 많이 팔기로 했어요.”
꽃집 주인이 대목을 포기할 정도로 장미 가격이 폭등한 이유는 뭘까? 생각해보니 올해는 서양의 발렌타인 데이와 홍콩의 발렌타인 데이격인 정월 대보름날이 2월14일로 같은 날이었다. 그것도 두 날이 19년 만에 겹치는 데다, 정월 대보름은 춘절 기간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는 피날레이자 축일이었으니. 매년 침사추이에서 열리는 봄 등축제의 올해 테마가 세계 각국의 신랑신부 이미지를 담은 ‘사랑’인 이유가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길일을 중시하는 홍콩 사람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듣자 하니 발 빠른 연인들은 이미 2년 전부터 갑오년 2월 14일을 결혼식, 혼인 신고하는 날로 잡아두었던 모양이다. 홍콩 최대 규모의 도교사원 웡타이신에서도 부부가 될 남녀를 붉은 비단실로 이어준다는 전설 속 중매의 신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벌써부터 방문객들을 맞을 채비로 분주했다.
으뜸가는 쇼핑의 천국답게 홍콩의 쇼핑몰들은 한바탕 데코 전쟁을 치뤄가며 한 달 내내 커플들의 지갑열기 경쟁에 돌입했다. 밸런타인 데이에 선물을 받은 쪽이 귀엽게 포장된 사탕을 건네던 유행이 사라지고 그 대신 가격대가 비슷한 선물로 보답하는 동등한 화이트 데이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으로 만든 카드나 수제품, 또는 받은 선물에 비해 턱없이 저렴한 선물을 내밀었다가 ‘배은망덕’하다고 찍히고, 초코릿, 사탕, 손편지, 종이학 등은 ‘최악의 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초콜릿이 무슨 선물인가요? 그건 정식선물을 주면서 얹어주는 덤이죠. 혹시 유럽산 수제 초콜렛이나 프렌치 마카롱 정도라면 선물로 봐줄 수도 있지만요. 아무튼 발렌타인 선물 고르는 일, 정말 쉽지 않아요.” 댄스 강사인 싱글녀 S가 토로했다.
“저는 무슨 선물을 할까 고민하는 데 힘을 낭비하지 않아요. 여성지에서 추천하는 아이템 중 하나를 사버리니까요. 나중에 카드값 때문에 고생은 좀 하죠.” 30대 싱글남 B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선물 고르는 센스가 제로인 남자친구 때문에 저는 아예 받고 싶은 선물을 찍어주기 시작했어요. 제가 무슨 여배우도 아 닌데 매번 마음에 안 드는데 좋은 척, 실망 안 한 척 연기하는 것, 정말 짜증나거든요.” 연애 4년차 스튜어디스 P가 남친을 떠올리며 양미간을 찌푸렸다. 애인 없는 솔로들이 부러워할 만큼 발렌타인 분위기를 제대로 만끽하는 커플을 만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상대가 마음에 쏙 들어하는 선물을 못 하면 어쩌나, 멋진 선물을 받는 건 좋지만 한달 뒤에 받은 것만큼 돌려주지 못 하고 실망시키면 어쩌나 이래저래 고민하는 연인들을 보다가 안쓰러워진 나는 돌연 광고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았다.
쇼핑몰이나 미디어에서 강추하는 ‘여심을 사로잡는 선물 리스트’ ‘내 남자를 위한 Must buy 아이템’이 없는 세상이라면, 연인들은 과연 어떻게 진심을 전달하고 마음을 표현할까. 밸런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는 어떤 날로 인식이 되고 어떤 하루로 기억 속에 남게 될까, 그런 의문들이 피어올라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자세로 상업주의에 맞서 아무것도 주고 받지 말라는 억지는 부리고 싶지 않다. 다만, 세상 모든 연인들의 축제가 되어버린 발렌타인 데이가 선물 고민으로 찌든 날들로 퇴색되지 않기를 소망할 따름이다.올해에는 연인에게 줄 선물 때문에 끙끙대며 고민한다는 청춘을 마주치면 이렇게 권해볼 작정이다. 둘이서 주고 받을 선물보다는 이해심의 사이즈를 되짚어보고, 시크한 인증샷보다는 더욱 오래 남을 가슴 속의 추억을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무슨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느냐고 흘겨봐도 어쩔 수 없다. 진정한 로맨스의 근원지는 지갑이 아닌 심장이어야 하기 때문이고, 아무리 상품화된 사회라고 해도 연인들의 축제는 신상품 교환보다는 진심의 교류에 의해 더욱 빛나는 특별한 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 사진 : 베로니카 리(Veronica H Lee) 홍콩, 라이프코칭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