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피지, 19세기 후반까지 식인풍습 존속

 

남태평양 환상의 섬나라 피지를 가다 [상]

피지(Fiji)는 남태평양 섬나라다. 호주 동쪽, 뉴질랜드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야 닿는다. 서쪽에 바나투와 뉴칼레도니아(프랑스령) 등 다른 멜라네시아(Melanesia) 나라들이, 동북쪽에는 독립국 사모아와 미국령 사모아가 나란히 있다. 사모아는 세계에서 가장 사납고 맹렬한 기질을 가진 ‘전사들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동남쪽에는 통아(Tonga)왕국이 있다. ‘통가’라고만 알았던 나라가 여기 와보니 ‘통아’라고 불렸다. 한때 피지를 지배했던 통아인은 총명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피지인은 사모아인과 통아인의 중간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목각 등 수공예와 시각예술이 특기다.

피지는 멜라네시아에 속하지만 엄밀히 말해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Polynesia)에 걸쳐 있다. 태평양의 광대한 수역은 크게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등 3대 권역으로 나뉜다. 서북부의 마이크로네시아는 마닐라에서 필리핀과 한 데 묶어 지배하던 옛 스페인령이다. 괌(미국령)과 마이크로네시아연방국, 키리바티, 마샬군도, 북마리아나군도, 팔라우, 나우루 등이 있고, 모두 합해 인구 50만 명 정도다. 태평양상 적도 북쪽에 있는 섬나라들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서남부의 멜라네시아는 남태평양 서부 호주와 뉴질랜드 북쪽의 섬나라들이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아일랜드, 바나투, 피지 등이 주요 국가다. 멜라네시아는 피부색이 짙다는 데서 나온 이름으로, 유럽인들이 상대적으로 피부색이 엷은 편인 폴리네시아인과 구별하면서 명명했다. 서부 태평양이 북쪽 마이크로네시아와 남쪽 멜라네시아 등 두 부분으로 나뉜다면 동부 태평양 전체는 폴리네시아에 속한다. 사모아와 통아 외에도 뉴질랜드, 하와이(미국령), 투발루, 쿡아일랜드, 폴리네시아(프랑스령), 이스터아일랜드(칠레령) 등이 주요 나라다.

 

피지에는 브룩 쉴즈가 1980년대 출연한 영화 <블루 라군>과 톰 행크스 주연의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영화 <캐스트어웨이>를 촬영한 로케이션이 있다. 그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과일과 작물, 물고기와 광물자원이 넘치도록 풍부한 나라다. 태평양을 둘러싼 환태평양 국가들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보통 해안의 식생이 다양할 뿐 아니라 특히 나무들이 보기 좋다. 피지도 예외가 아니어서 무성한 숲이 볼 만하고 백단향나무 산지로 유명하다. 여름철에는 곳곳에 붉은 하이비스커스, 하얀 프렌치 페니, 분홍색 부겐빌리아, 노란 벨플라워가 만발한다.

피지는 당장 굶거나 얼어 죽을 걱정이 없는 열대인데다 친족·이웃끼리 음식이나 소유물을 공유하는 공동체의식이 아직 살아 있어 일종의 전통 사회안전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피지 사람들은 항상 느긋하다. 피지에 머문 2주일 동안 로컬버스를 이용했는데, 버스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아무도 좌석에서 미리 일어서는 법이 없었다. 어깨 위의 줄을 당겨 버스가 정차하면 그제야 일어나 뒤쪽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온다. 성급한 한국 사람들은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하고 고개를 돌려 쳐다볼 지경이다. 피지에는 손목시계를 찬 사람이 별로 없다.

 

무덤 앞에 872명 잡아먹은 표지석

피지인의 또 다른 특징은 몸집이 크고 뚱뚱한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남태평양 전체에 걸친 현상이지만 공식통계상 피지의 비만율은 30%를 넘는다. 그러나 뚱뚱한 사람들은 주로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피지 원주민(Kai-Viti)들이고, 40%의 인도계는 대부분 날씬하다. 비만체형을 유전적 소인으로 치부한다면 해석이 간단하겠지만 20세기 초 기록사진을 보면 피지 원주민들은 그다지 뚱뚱하지 않다. 결국 비만의 원인은 식사와 생활습관에서 찾아야 한다. 채식 위주인 인도계는 이민 5세대가 지난 지금까지 대부분 마른 몸매를 유지하는 반면 원주민들은 육식과 기름을 이용한 튀김 요리를 포식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청량음료를 입에 달고 산다.

피지에는 19세기 후반까지도 식인풍습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식인종은 아프리카 오지나 파푸아뉴기니 산간에서나 있는 줄 알았는데 피지에 와보니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니었다. 1867년 35세 영국 출신 감리교 선교사 토머스 베이커는 피지 원주민 신도 9명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산간 마을에 선교차 갔다가 몽땅 죽임을 당하고 식사거리가 됐다. 전해지는 말로는 마을의 추장이 베이커로부터 머리빗을 빌렸는데, 베이커가 머리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피지의 풍습을 무시하고 빗을 돌려달라며 추장의 머리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베이커와 신도 7명을 죽인 다음 구워 먹었고, 신도 2명은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피지의 식인풍습은 끊임없이 벌어졌던 부족 간 전쟁에서 죽였거나 포로로 잡은 적에 대해 행해진 것이었는데 사후의 생을 박탈하는 궁극적인 복수이자 치명적인 모욕이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산 채로 뜨거운 솥 안에 던져지거나 자신의 수족이 잘리는 것을 보고, 심지어는 그것을 강제로 먹어야 하는 고문을 당했다. 피지 본섬 비티 레부 동북쪽에 있는 조그만 마을 라키라키 동구 밖에는 1849년 죽은 추장 우드레우드레의 무덤과 872개 표지석이 있다. 그 돌 1개는 그가 잡아먹은 적 1명을 각각 표시한다. 현재 추장 아들에 따르면 우드레우드레는 다른 음식은 거의 먹지 않고 인육을 즐겼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법도 없이 혼자 다 먹어치웠다고 했다.

피지에는 기독교도가 많다. 뉴질랜드 인구 중 절반만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자처한 데 비해 피지 원주민의 80% 이상이 기독교도라고 말한다. 개신교 가운데 감리교가 주종이지만 성령파와 하나님의 성회, 제7일 안식교회 등 선교에 적극적인 교파들이 세를 넓혀가고 있다. 기독교가 본고장 구미에서는 위축되고 있지만 개종한 지 얼마 안 되는 나라일수록 열심인 또 한 사례다. 인도계는 대부분 힌두교와 이슬람 교인이라고 한다.

지난해 12월 중순 피지 수도 수바에 간 길에 김성인 피지 주재 한국대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기재부 등 경제부처와 외교부 다자외교국장을 거쳐 피지에 부임한 김 대사는 “피지가 남태평양 14개 섬나라의 교통·통상 중심일 뿐 아니라 100만 ㎢ 넘는 배타적경제수역(EEZ)에 ‘해저열수광상(熱水鑛床)’이라는 유망 자원을 갖고 있고, 산호에 200종 넘는 미생물이 살고 있어 ‘신물질 발견의 보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열수광상이란 지하의 마그마에서 방출된 열수가 상승하면서 그 속에 포함하고 있던 금, 구리 등 유용광물이 침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은 민관합동으로 2011년 피지에서 2만 ㎦의 광업권을 확보한 바 있다고 한다.

 

김 대사는 앞으로 피지에 한국 젊은이들이 진출해 IT분야 기술을 전수하고 피지와의 공동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R&D센터를 마련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한국 원양어업의 대종인 참치잡이 어업권 확보도 중요한데 점점 입어료가 비싸지고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있어 조직적 협상전략과 협력사업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피지처럼 한가한 곳으로 여겨지는 나라에 대사로 부임하면 별 생각이 없기 일쑤일 텐데 그는 외교관으로서 열정과 명민함이 돋보였다. 김 대사는 피지와 남태평양 지역은 한국인에게 말 그대로 ‘블루오션’임을 거듭 강조했다.

수바 외곽에는 남태평양 12개국 정부가 공동 설립한 남태평양대학(University of South Pacific·USP)이 있다. 찾아가 보니 일본이 2010년 ICT(정보통신기술)센터, 2012년 대학극장을 지어준 뒤 일본 국명과 일장기를 크게 붙여놓는 등 생색을 내고 있었다. ICT센터는 이름만 그럴싸할 뿐 대학 라디오방송과 강의실이 있는 정도여서 허울뿐이라는 인상이었다. 극장도 덩치만 클 뿐 공연장으로 얼마나 활용되는지 알 수 없었다. 중앙도서관과 이학계열 실험실이 기초적 수준에 불과하고 현지인들의 평가를 들어봐도 USP의 학문 수준이 아직 높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됐다. 한국이 R&D센터를 USP 부근에 짓고 젊은 연구진을 파견한다면 피지와 공동으로 산학연계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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