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규 박사 “내 꿈은 미 국무장관, 남북통일에 도움 되고 싶어”

<사진=김남주>

여공에서 하버드까지 ‘희망의 증거’ 서진규 박사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져 있던 한국 사회에 어느 날 ‘희망의 증거’를 들고 나타나 꿈같은 인생역전의 성공 스토리를 보여줬던 서진규 박사(66). 경남 동래군 어촌마을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충북 제천에서 힘겹게 중학시절을 마친 뒤 상경해 여고를 졸업한 그는 19살 가발공장에 다니던 이른바 ‘공순이’였다. 만 23살 되던 해 식모살이 하러 미국으로 갔다가 식당 웨이트리스가 됐던 그는 지금 미군 소령으로 전역한 하버드대 박사다.

눈물과 고통, 그리고 의지와 노력으로 점철된 인생역전의 전형이었다. KBS ‘일요스페셜’과 MBC ‘성공시대’의 주인공으로 유명인사가 된 그의 자전에세이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1999)는 곧 서점가를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그런 그가 지난 연말 서울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 강의실에 나타났다. 자신을 여러모로 닮은 딸과 함께 강의를 듣고 학교행사에 참여했다. 어떤 사연일까.

-2006년 하버드대에서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떻게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게 됐나.

“딸 성아 역시 나처럼 미군인데 지난봄부터 한국에서 근무 중이다. 딸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를 전공했는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동북아 정세’에 대한 강의를 듣겠다고 하더라. 내 전공도 비슷하고 앞으로 필요할 것 같아서 연구생으로 같이 수업을 듣게 됐다. 지금까지 국제정세는 미국에서 많이 공부했으니 여기선 전문화된 ‘북한외교론(구갑우 교수)’ 수업을 들었다.”

-앞으로 하려는 일에 북한학이 필요한가.

“동북아 정세에서 북한을 빼고 얘기할 수 없다. 하지만 북한을 공부하니 동북아 정세는 더욱 복잡하기만 하고, 해답을 내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남북통일에는 미국의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미국 국무부장관이 돼서 도움을 주고 싶다.”

서진규 박사는 지금까지 2000번이 넘는 강연을 통해 자신의 성공비결을 얘기했다. 서 박사는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선언하며 희망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사진=김남주>

-지금의 꿈은 미 국무부장관인가.

“꿈은 선언해 놓아야 그 길로 하나씩 발걸음을 옮기며 구체화될 수 있다. 못할 것 없지 않은가. 내가 못하면 딸이 그 길을 이을 수도 있고. 궁극적으로는 내 성공비결을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남은 인생이 행복할 것 같다.”

서진규 박사의 딸 조성아(38) 씨 이력도 어머니와 비슷하다. 하버드대에서 ‘정부, 동아시아연구’를 전공했고, 14년째 미군에서 복무 중이다. 앞으로 미 국무부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서진규 박사는 42살에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합격해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언어학을 전공하고 58세 되던 200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최초의 아시아 모녀 재학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에서도 북한대에서도 계속 모녀 학생이다.

“하버드에서는 모녀가 한국학과 뉴스레터에 표지인물이 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성아가 1998년에 이화여대에 교환학생으로 갔는데 그 때 한국 언론에 알려지게 됐다. 사실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 힘든 적이 많았는데,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포기할 수 없었고 끝까지 버텼다.”

-하버드를 꼭 가야했던 이유가 있다면.

“미군에서 일본 자위대와 협상하는 지역전문가 공모에 신청했는데 떨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식민지 나라에서 온 여성이라서 떨어졌다는 거다. 의지와 노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있었다. 천장이 투명하니까 올라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벽에 부딪쳤다. 그래서 워싱턴DC까지 쫓아가서 관계자를 설득해 결정을 번복시켰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이 여자라고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능력도 있지만 그가 ‘영국’ 사람이라서 무시하지 못하는 거다. 나도 ‘미국’이라는 배경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이 날 여성이라고 무시하겠냐며 설득했다. 하버드라는 만능열쇠가 필요했고, 그래서 석박사에 도전했다.”

-박사 과정에서는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2006년 8월 박사논문이 통과된 뒤 한국에 왔다. C형간염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미군 첫 여성 지역전문가로 일하면서 나 말고 모두 남자였는데 술을 안 마실 수 없었다. 여자라서 못했다는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 협상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러는 사이 간암 위험수준이 됐고, 그 와중에 논문을 썼다. 의사들은 치료해도 낫지 않는다고 했다. 어차피 논문을 써도 안 써도 치료할 수 없다면 학위나 받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졸업하고서야 한국에 치료하러 나온 것이다. 치료 안 돼도 더 미련은 없었다. 박사를 했으니.”

서진규 박사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서진규의 희망> 등 ‘희망’에 대한 책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자녀교육법, 유학생활 성공기 등을 소개했다. <사진=김남주>

“앞을 가로막은 벽은 곧 열어야 할 문”

-박사라는 꿈을 이룬 뒤 자살을 생각했다고.

“C형간염이 아니라 우울증으로 자살할 뻔 했다. 인터페론 주사를 매주 맞았는데 우울증이 왔다. 24시간 내내 나와 싸우는 과정이었다. 특히 어릴 때 고생과 밑바닥 출신이라는 죄밖에 없는데 멸시받아야 했던 분노 등이 자꾸 떠올랐다. 자살을 생각하다가도 ‘내가 멸시받는 사람들 위해서 싸우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세상을 구한다던 나의 위대한 사명은 어떻게 됐나’ 그런 생각도 했다. 끊임없이 내 자신과 싸우면서 완치까지 왔다.”

1971년 혈혈단신 미국으로 온 것도, 29살 나이로 미군에 자원입대한 것도 사랑에 실패하고 가정폭력에 희생된 뒤였다. 인생의 나락에서 던진 극단적인 선택이었지만 앞을 가로막은 벽은 열어야 할 문이었다. 그곳에 길이 있었다.

“지금까지 전 세계를 돌며 강연한 게 2000번 이상 되나 봐요. 강의가 재미있어요.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몇 천 명까지 몰입해서 웃고 울면서 그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 게 느껴져요. 미국인들은 성공비결을 잘 받아들여요. 강의가 끝나면 찾아와 내 강의가 전환점이 됐다며 자기 꿈을 선언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만이 가진 내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서진규 박사는 오는 4월 영국 북페어에 참여해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연설한다. 5월에는 뉴욕에서 열리는 북페어에서 사인회를 연다. 어린 시절 환경에 지배당하는 것이 억울하고 분해 ‘어사 박문수’처럼 정의의 사도가 되고 싶었던 서 박사는 이제 전 세계를 누비는 ‘박문수’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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