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에 일본 전함 동원”

캐나다 참전군인 존 비숍 증언

6·25전쟁에 과거 일본군 인력과 장비가 대거 동원됐음은 유엔군 참전군인에게도 확인된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에 일본 전함이 사용됐다는 증언은 그동안 공식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어서 주목된다.

존 비숍 (82?John R. Bishop?사진) 캐나다군 예비역 중령은 인천상륙작전에 일본 상륙정(landing boat)과 장비가 사용됐다는 증언을 6·25 당시 다수의 미군들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과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조사과정에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군 해병대원들 인터뷰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때 일본군 상륙정이 사용된 것은 맥아더 사령관의 전쟁물자 징발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안다. 맥아더 사령부는 포탄을 고지로 나르는 데 한국 민간인들을 대거 동원해, ‘지게부대(A-frame unit)’라 불렸다. 한국전 승기를 잡기 위해 고심하던 일본 주둔 유엔군 사령부가 전투경험 많은 일본 인력과 장비를 동원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항복 5년 이후에도 이런 군 장비를 그대로 갖고 있었으며, 더구나 그것을 한국전쟁에 보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비숍은 종전 50주년이던 2003년 캐나다 한 방송사의 의뢰로 장편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6·25 당시 프린세스 패트리셔 경보병 제2대대 소속으로 캐나다군 최대 격전지였던 가평전투에 참가했다. 종전 이후 유엔 정전위 연락장교로 판문점에서 복무했다. 다음은 캐나다 밴쿠버 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나 나눈 일문일답.

6·25전쟁 비사를 담은 존 비숍 회고록

– 당시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어떤 내용인가.
= 부산 유엔묘지에서 출발해 캐나다군의 전황을 좇아 밀양과 가평전투를 집중 조명했다. 또 인천상륙작전의 발자취를 따라 서울 수복 이후 상황을 보여주었다.

– 한국전쟁 참전 과정은?
= 1950년 8월 자원 입대해 훈련 받고 11월25일 시애틀에서 출발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2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상륙 이후 밀양에서 게릴라 소탕전을 벌이다 51년 2월15일 북진을 시작했다. 대구·대전·장호원을 거쳐 38선 부근에서 주요 전투를 했다.

– 가평전투를 말하는 것인가.
= 그렇다. 정확히는 51년 4월22일부터 25일까지 벌어진 격전이다.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맞서 싸운 것인데, 아군 보병은 우리 대대와 오스트레일리아 1개 대대, 미군 1개 중대 등 6백명 정도인 데 반해 중공군은 10배 이상 많았다. 한때 중공군에 포위당해 고립되기도 했으나 677고지 등 주요 포스트를 사수했다.

– 당시 계급과 임무는?
= 상병으로서 10명 단위의 소총편대(rifle section) 를 지휘했다. 포성과 총성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 때 입은 청력 손상이 평생 회복되지 않았다. 1951년 귀국해 보병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장교훈련을 받고 53년 소위로 임관했다.

– 경력을 보면 베트남전과도 인연도 있다.
= 1973년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종전협정 이행 감시업무를 맡았다. 당시 한국군 철수를 감독하게 돼 묘한 감정이 들었다.

– 1982~84년 다시 한국에서 근무했는데.
= 판문점에서 유엔 정전위원회 연락장교로 일했다. 정전위반 사례가 보고될 때마다 나가 조사하는 임무였다. 때문에 군사분계선 155마일 중 안 가본 곳이 없다. 아내 주디 (Judy)는 간호사인데 세브란스병원 국제의료원에서 일했다. 그래서 한남동에 집을 두고 주말부부로 살았다.

– 이후 한국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은.
= 한국은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전쟁 중 4번이나 주인이 바뀌면서 폐허가 됐던 서울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다. “놀랍다(mind-boggling)” 는 말밖에 달리 표현을 찾을 수 없다. 가평전투 50주년 기념식에 동료 전우들과 같이 방문했었는데, 한국의 발전된 모습과 한국인들의 호의에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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