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진출 한국인 사업가가 감옥 간 까닭은?
17세기 피렌체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목숨 걸고 주장했던 ‘지구는 둥글다’는 명제는 이제 옛말이 됐다. ‘렉서스와 올리버 나무’로 유명한 세계화 전도사 토마스 프리드만이 국경이 없어진 21세기의 비즈니스 환경에 대해 ‘세상은 평평해졌다’고 떠들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둥근 지구가 하루 아침에 납작해질 리 만무하나 그만큼 세상이 좁아졌다는 의미다. 미국 어느 시골의 개인 병원 안내전화를 인도에서 받고, 한국의 아내와 앙골라로 파견 나간 남편이 인터넷으로 화상통화한다. 그것도 무료로. 중국 벽지의 인권유린 현장이 한 시간도 안돼 유튜브에 업로드 돼 온 세상 사람들이 공유한다. 뉴욕에서 기침하면 중국에서 감기 걸리는 세상이다.
세상 동서남북 어디를 가나 쉽게 눈에 띄는 한국 글로벌기업들의 간판과 기업행위 역시 낯설지 않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의 눈시울을 달궜던 한국 기업의 회사 로고들이 이제는 여행사진의 배경으로도 삼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공항에 즐비한 카트의 손잡이 로고에서부터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미식축구 슈퍼볼 막간 광고 그리고 지상 800m에 달하는 세계에서 최고 높은 두바이의 버즈두바이 건물과 필자의 제2의 고향인 캐나다 밴쿠버의 아름다운 현수교 건축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업의 해외진출은 광활하다. 현지에서도 가장 좋은 위치에 그들의 제품이 진열되고 있고 그들의 해외법인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한국기업들의 현지 적응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말과 문화가 다른 현지인들의 채용과 유지와 해고 과정에 쏟아 붓는 돈은 천문학적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특히 소송의 나라 미국에서 한국 기업들이 지긋지긋한 법정 투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필자가 현지교육 중 만난 흑인 인사담당자에게 “그건(That case)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더니 너무 많아 기억을 못한다고 했다. 이미 미국에서는 상식이 된 “인종문제”와 “성희롱”과 ‘균등고용(Equal Employment Opportunity: EEO)’과 같은 단어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초일류 기업들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심각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해외업무를 관할하는 정부부서나 외국에 주재원을 파견시키는 일류 기업 정도라면 이제 세계화에서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는 단편적인 사실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문화간 경영(Intercultural Management)’에는 인색하거나 일천하다.
이들은 문화적인 이해와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이 비즈니스 성사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늘 해왔던 투박하고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방법으로 외국인과의 협상자리에 나선다.
심지어 비즈니스에서 힘의 논리인 ‘갑’의 위치에 자위하며 현지인들을 관리?감독하는 주재원이나 감독자로 파견된다. 이들에게 문화는, 멕시코의 술 테킬라 속에 든 벌레를 볼 때처럼, 그저 이국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식 정도로 치부되거나 해외 주재나 해외 사업 전 손에 쥐어주는 ‘해야 할 것(Do)’과 ‘하지 말아야 할 것(Don’t)’을 적은 단편적인 행동 처방전 정도가 된다.
좋은 대학 나와 훌륭한 기업 문화 속에서 잘 정제된 초일류 비즈니스맨의 세계가 만약 이렇다면 ‘글로벌 에티켓’이 무엇이고 ‘문화적 상대성’이 무엇이고, 세상에 몇 언어가, 몇 종교가, 몇 종족이, 몇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대부분 일반인들의 해외격랑은 또 어떨까?
케냐로 파견된 선교사가 현지의 마사이족 선교전략의 일환으로 아이들부터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위생에 대한 인식을 높여 현지에 교회를 짓는 등 번창하였지만 어느 날 목욕한 마사이족 성인이 사자에 물려 죽는 바람에 선교의 벼랑을 맞았다. (마사이족은 전통적으로 몸에, 다른 야생동물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갖가지 칠을 한다)
베트남에 공장을 차린 한 중소기업 사장은 현지인이 “어이! (여보세요의 뜻)”라고 부르는 것을 한국식 ‘어이’로 착각해 심하게 혼을 내주었다가 외국인 1호로 베트남 감옥에 갇혔다.
파리 시내의 한 유명 호텔은 한국인들이 방에서 라면을 끓여먹어 호텔이 온통 냄새로 진동케 하고, 또 그 찌꺼기를 마구 변기에 버려 변기를 막히게 하고, 비치되어 있던 비누, 샴푸, 구두 솔은 물론 재떨이까지 몽땅 들고 가서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사절한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
어느 한국인 골프선수는 필리핀 골프장에서 현지 캐디를 골프채로 때렸다가 입건됐고, 한 한국 남성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에서 성매매하다가 현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한국의 세계화 여정은 이렇게 파란만장하다.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으로 격상됐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세계경영개발원(IMD)나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하는 세계 120여 개국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이 10위권에 포함됐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놀라는 한국인도 별로 없다.
하지만 엄청난 경제발전 속도에 비해 한국인들의 문화적 수준은 버금가지 못했다. 국가경쟁력 평가의 면면을 훑어보면, 한국의 ‘문화적 폐쇄성’은 여전히 후진국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일전에 프랑스의 문화비평가 기 소르망이 ‘한국에는 문화재는 있으나 문화적 이미지는 없다’라고 혹평한 것에 대해 ‘아니다’라고 반박할 만큼 문화적 수준은 성숙하지 못했다.
문화는, 자유의 여신상을 없애고 만리장성을 통과하는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처럼, 단박에 “짱” 하고 생기거나 바뀌는 것이 아니다. 고래로 백의민족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인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어 온 ‘붉은(Reds)’ 색 옷을 온 몸에 두르고(그래, 한국은 이제 더 이상 백의민족이 아니라 치자), 월드컵 축구경기 내내 쉬지 않고 고 안익태 선생의 애국가를 락큰롤으로 변용해 소리쳐 외친다고(그래, 한국은 더 이상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치자) 고래의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아주 천천히 바뀐다. 문화는 유행이 아니다. 많은 한국인의 눈에 ‘문화’는 여전히 영화나 연극 혹은 문화재 등의 가시적인 상징물로만 여겨질 뿐, 국경을 넘고 세상과 더불어 하나되는데 필수 불가결한 정신적 관문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다. 이들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대로 따르라’는 외국 속담과는 무관하게 신토불이 한국식 오기와 투지만 가지면 세상 어디에 가든 문제없이 적응하고 승리할 것으로 자부한다. 문화는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광범위하다. 문화는 인간의 삶 모든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태어날 때 산파에 의해 전달되는 출산방법부터 죽을 때 장례사에 의해 땅에 묻히는 장례방식까지 모든 과정이 문화의 영향권에 속한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옹알이’를 하는 것부터 죽을 때 ‘유언’을 하는 방식까지 모두 사회문화적 영향이다.
미국사람이 푹 들어간 눈에 쌍꺼풀 지고 코가 크며, 한국사람은 눈이 가느다랗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이빨이 튼튼한 것까지 모두 문화환경적 영향이다. 하다못해 개 짖고 고양이 우는 소리에까지 문화가 영향을 미친다. 인간 본연의 본성을 제외하고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문화가 영향을 미친다. 글의 형식도 문화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에 대해 포괄적인 안목을 갖게 되면, 자기중심적이고 특수적인 태도가 상대적이고 보편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외양과 말투와 행동양식으로만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고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상대방의 사고체계와 가치관과 종교관의 영향까지 염두에 두고 상호간의 관계형성에 주력하게 된다.
상대방에게 자신들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우선 존경(respect)과 공감(empathy)과 감사(gratitude)의 표시를 하게 된다. 점차 태어나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지구 저편의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의 폭이 확대된다. 드디어 세계가 하나가 된다.
이쯤 되면, 신토불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입에서, 중국 사람들이 쥐고기 먹는다고 징그럽다고 말하고, 프랑스 연인들이 길거리에서 사랑을 진하게 속삭인다고 손가락질하고, 독일 사람들이 지나치게 원칙적이라고 답답하다고 투덜거리고, 브라질 사람들이 시간관념이 없어 게으르다고 무시하고, 멕시코 사람들이 여자를 함부로 대한다고 야만인 대하듯 하고, 인도사람들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다고 불결하다고 말하고, 뉴질랜드 마오리족이 인사할 때 코를 비벼 냄새 난다고 빈정대며 말하는 일이-휴우!- 우리들의 입언저리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차이의 존중은 종교적 이념 이상이다.” – 조너단 색스 (유대교 신학자,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