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가 김영환 “고문으로 숨진 北주민 영전에 훈장 바칩니다”
북한인권운동을 벌이다 지난 3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114일만에 풀려난 김영환씨가 지난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대한민국인권상’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북한인권단체들은 그의 수훈을 기념해 26일 저녁 전국은행연합회에서 ‘북한인권의 밤’을 마련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을 맡고 있는 김영환씨는 이 자리에서 “북한민주화운동을 공식선언한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북한은 동토의 땅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서 아쉽고, 자성하게 된다”고 운을 뗐다.
김영환 위원은 서울대학교 82학번 재학시절 운동권 지침서인 ‘강철서신’을 내놓은 저자다. 이 책은 80만부가 복사돼 대학생들한테 읽혔다. 주사파 운동권의 대부였던 그는 1991년 지하당 조직 ‘민혁당’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나 북한을 알게될수록 북한은 그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결국 그는 북한을 다녀오고 탈북자를 만난 뒤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북한 민주화운동’의 길로 뛰어들었다.
변절자, 배신자로 비난 받았지만,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알리며 북한인권운동의 저변 확대에 힘썼다.
김영환 위원은 “북한 민주화의 주인공은 북한 주민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양쪽에서 교육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3월 중국 구금 당시의 이야기도 풀어놓았다.
“중국은 독방이 없다. 자살 방지를 위해선데, 3달간 25명과 7평에서 지냈다. 마약사범 5명도 함께 있었다.”
그는 마약사범으로 사형집행유예 2년을 받고 같은 방에서 구금 중이던 거구의 작업반장 이야기를 꺼냈다.
“그 작업반장은 매우 험악하고 사나운 사람이었다. 어느날 그가 불같이 화를 내며 절도죄로 같은 방에 있던 젊은 친구를 때리려고 했다. 그 순간 그 안에 있던 23명이 순간적으로 ‘이러지 마라’하며 말렸다. 만약 그 작업반장이 젊은 친구를 때렸다면, 집행유예가 취소돼 사형이 집행됐을 것이다. 그 몇 초간은 그 작업반장의 목숨이 왔다갔다한 순간이었다.”
김영환씨는 이 순간 북한의 상황을 떠올렸다고 했다.
“북한에서도 말 한마디로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 교도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독서토론회를 만들었다고 전원 처형을 받는가 하면, 조금만 비난 비슷한 소리를 해도 보위부에 끌려간다. 정치범수용소는 완전통제구역이라 살아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북한의 인권 실상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앞으로의 북한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김정일 사망 1년이 지났다. 겉보기로는 안정적이지만 김정은의 1년 정책을 보면 오락가락 한다. 안정적이거나 균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맞은 것이다. 김정은의 통치는 김정일의 유산 자리를 받은 것이 아니다. 북한의 정치체제가 버텨온 요소는 김정일의 권력과 체제유지 능력이었다. 김정은이 짧은 시간에 김정일 만큼의 독재능력을 갖추긴 어려울 것이다.”
김영환 위원은 한국이 북한의 체제변화를 적극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뭘 할 수 있을지 집중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의 북한 이슈에 대해서도 짧은 소회를 밝혔다.
“사실 북한인권만큼 국민통합에 적합한 이슈는 없다.?바로 우리 주변에서 인권을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북한 주민들이다. 그런 면에서 진보쪽에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을 구석으로 몰고 압박하기 보다는 퇴로를 열어주며 보수와 진보가 함께 인권운동을 해나가야 한다.”
김영환 위원은 종종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린다고 했다. 하지만 명상이 더 괴로운 시간도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 고문당하며 생각한 것은 북한 주민들이 당하는 정치적 고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명상할 때 북한에서 고문 당해 죽은 사람들이 떠올라서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숨진 사람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아닌가 한다.”
김영환 위원은 이번에 받은 국민훈장을 그 영웅들에게 바치겠다고 했다.
“북한이 민주화돼서 그들의 이름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지금 제가 받은 훈장 이상을 그들의 영전에 바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