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령, 혜화동로터리 군고구마 할아버지

이름을 묻는 기자에게 "여자이름 같아서 창피하다"며 한사코 가르쳐주지 않았다. 혜화동로터리 군고구마 할아버지면 충분.

12일 출근길. 비온 뒤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낙엽이 어지러이 날리고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걷습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로터리를 지나는 길, 군고구마 할아버지가 등장했습니다. 혜화동로터리 롯데리아 앞 군고구마 할아버지는 겨울의 전령입니다. 17년간 혜화동로터리의 겨울을 지키며 이 동네 명물이 됐습니다.

“할아버지 일찍 나오셨네요. 오늘 개시한 건가요?”
“아니, 지난 주부터 나왔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 그렇군요. 몇 시에 나오세요?”
“아침 7시30분에 나와. 아침에 군고구마 찾는 손님이 있어서. 저녁에는 9시에 들어가고.”
“추울수록 군고구마를 찾는 손님이 많죠?”
“꼭 그렇지도 않아. 적당히 추워야 해. 영하 2도~영상 3도 쯤이 가장 좋아. 너무 추우면 나도 고생이고 손님들도 집에 들어가기 바빠.”

누드 군고구마

할아버지는 다른 군고구마 장사와는 달리?군은행, 군밤, 군옥수수도 팝니다. 군고구마도 누드로 특별합니다.

“이게 전북 고창에서 온 호박 고구마야. 가끔 맹숭맹숭한 놈도 있지만 다 달고 맛있어. 손님들이 고구마 까먹는 게 불편해 보여 지난해부터 고구마를 깎아서 굽고 있어. 입술에 숯 묻혀가며 까먹는 재미는 사라졌지만, 좋아하는 손님들이 많아. 특히 아가씨들이.”

고구마, 옥수수, 군밤, 은행들을 태우지 않고 먹음직스럽게 굽기위해 고구마통도 특별 제작했습니다. 15년 전에 거금 70만원을 들였다고 합니다.

“이게 일반 고구마통보다 많이 두꺼워. 쇠가 빨라 달궈지면 고구마가 속도 익기 전에 탈 수 있어. 천천히 데워지고 천천히 식지. 내가 설계했어. 5년 전인가, 이걸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지금은 자물쇠로 단단히 고정시켜 놨어.”

할아버지가 군고구마 장사를 하는 기간은 11월 초부터 3월 말까지. 하루 수입은 12~17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아프지 않으면 쉬는 날 없이 일 합니다. 장사를 안 하는 기간에는 등산도 하고 잔디 다듬는 일을 하면서 보냅니다.

경남 거창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배가 고파 18살 때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올해 79세. 군대도 끼니를 때우기 위해 자원입대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미8군에서 관사에 기름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오일 딜리버리’라고 해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에 필요한 영어만 안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는 동네는 혜화동.

“할아버지, 군고구마 좀 주세요”
“사려고? 고맙네. 허허”

기쁜 얼굴로 종이 봉투에 넘치도록 고구마를 넣어주십니다. 오늘 아침은 건강 다이어트식 누드 군고구마입니다. 오래오래 할아버지의 군고구마를 맛 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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