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속 8개월된 아이의 눈망울이 바꿔놓은 ‘뿌스파’의 인생
“2004년 당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현장실습 과목 때 교도소를 방문할 일이 생겼어요. 여자 교도소엘 갔는데, 거기 8개월짜리 아이가 있는 거예요. ‘왜’라는 생각도 잠시, 그 아이가 제 옷소매를 잡았어요. 집으로 돌아와서 1주일 정도 잠을 못 이뤘어요.”
지난 2005년 네팔에서 감옥 재소자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ECDC(Early Child Development Center)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뿌스파 바스넷(Pushpa Basnet)은 “도대체 어떤 계기로 그 일을 시작하게 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자 교도소 철창 안에서 수감 중인 엄마와 함께 지내는 8개월 된 아이의 눈망울, 자신의 옷소매를 움켜쥔 그 조그만 양손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이다.
뿌스파는 3일 네팔기자협회 뿌루 조시(Puru Joshi) 기자와 함께 서울 종로구 아시아엔(The AsiaN) 사무실을 방문해 기자들과 만났다.
“왜 아이가 이 감옥 철창 안에 있죠?”
뿌스파는 “왜 아이가 여기 있느냐”고 물었고, 교도관은 “아이가 갈 데가 없다”라고 했다. 동그란 눈망울의 8개월짜리 아이가 뿌스파의 옷소매를 잡았을 때, 그녀는 엉겁결에 “내가 뭐 도와줄까”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그렇게 1주일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교도소를 찾은 뿌스파는 “(8개월 된) 아이를 어떻게 하면 교도소에서 데리고 나갈 수 있느냐”고 교도관에게 물었다. 교도관은 “개인은 안 되고 일정한 요건을 갖춘 사회복지단체라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뿌스파는 그길로 자신의 전 재산을 툴툴 털었고 마침 대학졸업과 동시에 재소자를 위한 보육원 ECDC를 만들었다.
“처음 4명 아이들로 재소자 보육원을 열었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엄마 도움을 받았지만, 갈수록 모든 게 힘들어졌죠. 생일 날 선물 받았던 금목걸이 등을 부모님 몰래 팔아 모은 돈으로 아이들을 먹였어요. 네팔의 유명 방송국에 소개된 뒤부터 조금씩 후원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오빠를 통해 ECDC 얘기를 들은 한 캐나다 여성은 매달 빠짐없이 기부를 해주고 계십니다. 조상 제사 때 선행을 베푸는 관습이 있는 네팔사람들도 저희 소식을 듣고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선물도 하고 함께 놀아주기도 하면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난 이미 받았으니, 못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게 당연”
한국의 현대그룹 등 지구촌 도처의 기업들과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높은 교육수준의 어머니는 뿌스파의 사회진출 방식이 달가울 리 없었다. 명문 카트만두대학 출신의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딸이 재소자의 아이들을, 그것도 수십명씩 데려다 키운다니 가당키나 했겠는가.
“15~20년 전까지만 해도 네팔의 모든 부모들은 자기 딸을 결혼시키는 것을 행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여겼죠. 제 부모님도 마찬가지였고요.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제 행동을 반대하셨어요. 힘겨운 갈등의 시간을 겪고 당신들의 딸이 나쁜 길로 가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 뒤로는 지원과 응원을 해주십니다.”
네팔에서는 딸 혼자 외국에 나가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이번처럼 서른둘 나이에 해외출장을 다니는 것을 걱정하시면서도 믿고 지켜봐주는 부모님이 자신의 최고 후원자라는 자랑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 뿌스파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내는 게 부모된 도리이겠지만, 그래도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손자 손녀를 볼 일이 없어도 이해할 부모일까 싶었다.
“저는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 말고 다른 누군가는 전혀 받지 못하고 자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도 누군가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뿌스파에게 행복이란?
그래도 진짜로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려고 작심한 걸까. 그녀는 행복이 뭔지, 나름의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유보하거나 포기한 것일까.
“아직 젊지만 진정한 행복을 체험해봤다고 자부합니다. 8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여기까지 와보니까 이제 행복이 어떤 것인지 확신이 들어요. 결혼을 해서 남편과 저의 자녀를 낳는다고 해서 이런 행복보다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그렇게 행복한 일, 어디까지 하고 싶은지,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제가 파악하기로 9월 현재 전국 교도소에 수감자인 부모와 함게 지내는 아이가 아직도 69명이 더 있어요. 단기적으로는 그 아이들을 거기서 해방시키는 게 목표입니다.”
누가 그녀와 비슷한 행복감을 갖고 실제 함께 그녀와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 9명이 함께 보육원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처음 교도소에서 만났던 8개월 된 아이의 엄마가 1년 반 전에 출소, 그 9명 중에 한 명입니다. 남편을 죽인 죄로 교도소에 수감됐던 그녀는 처음에 아이를 저한테 맡기지 않겠다고 고집해 저를 많이 속상하게 했던 분이죠. 지금은 보육원에서 염소 5마리를 키우면서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등하교를 책임지는 일을 맡고 있어요. 아 참, 수도요금 등 공과금을 내러 다니는 일도 그녀가 맡고 있어요.”
마약이나 살인, 교육을 못 받아 자기도 모르게 짓는 죄 때문에 짧게 몇 년에서 길게는 20~30년까지 교도소에 수감돼야 하는 엄마나 아빠들. 아마도 대부분이 ECDC에서 뿌스파와 함께 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사회나 전과자를 잘 받아주지 않으니까.
출소한 엄마들 중 4명은 뿌스파의 도움으로 목도리, 인형 같은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아서 양육비로 쓴다고 한다. 2명은 뿌스파가 돈을 꿔 줘 네팔의 만두를 만들어 파는 식당을 개업했다. 장사가 잘 된다고 한다.
뿌스파의 꿈
44명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면 돈도 수월치 않게 들어갈 것이다.
“44명 기준 한국 돈으로 월 280만 원 정도 필요합니다. 수입은 들쭉날쭉한데, 뭐 충분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아요. 다만 지금은 임대료를 내고 있어 임대료를 아끼고 더 많은 아이들이 좀 더 쾌적하게 지낼 자체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으고 있어요.”
2005년 왕정이 폐지되고 2008년 제헌의회 소집으로 공화정이 시작됐지만, 100개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를 기반으로 한 지방 호족들과 백가쟁명식의 정파들이 쉽게 근대, 혹은 현대적 의미의 발전 모멘텀을 잡지 못하고 있는 네팔. 국가가 가난을 필두로 한 각종 인권유린에 맞설 준비가 아직 안돼 있으니, 당연히 비영리 민간단체들이 나서서 각종 사회서비스와 빈민구제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하지만 그 중 몇몇은 엉터리도 있다.
“돈에 대한 모든 계산은 정확히 해야 합니다. 우선 정부가 ECDC 같은 비영리 민간단체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투명한 회계보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감시가 꽤 엄격한 편이지요. 그것을 떠나서 저와 ECDC를 그동안 돕고 지켜봐 주신 여러 분들에게 저는 항상 떳떳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된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한다는 의미지요. NGO, NPO가 많다보니 서로 헐뜯는 경우도 많으니, 만에 하나 꼬투리 잡힐 일은 아예 만들지 말아야죠.”
“네팔에 오시면 짬을 내서 아이들과 놀아 주세요”
뿌스파는 이번에 재단법인 일가재단이 수여하는 제 22회 일가상 수상자로 선정됐기 때문에 상을 받으러 왔다. 지난 2월 한국방송(KBS) 1TV 수요기획에서 방영된 <교도소에서 온 천사들>를 보고 강연 요청이 있어 지난달에도 한국을 방문했으니 이번이 두 번째다.
2012년 CNN 선정 올해의 영웅에 추천됐다. ECDC 창립 원년인 2005년 청년 이니셔티브(Youth Initiative) 어워드에서 수상했고, 이듬해 유명한 아쇼카 포럼 청년 사회기업가로 선정됐다. 2007년 네팔의 권위 있는 인권상인 나라데비상을 수상했고, 2011년 일본국제교류기금과 일본 국제문화회관이 주관하는 <아시아21 리더십> 대표를 맡았다.
한국의 첫인상은 너무 좋았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온 천사들> 제작을 총괄한 김진언 PD가 촬영 도중 걸핏하면 우는 바람에 촬영이 지연되기도 했는데, 그렇게 정이 많은 사람들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긴, 보육원에서 지내던 아이 엄마가 출소해 고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작진과 함께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인도로 건너간 사실을 들은 아이의 표정을 담는 PD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가정불화 끝에 엄마를 살해하고 교도소에 들어간 아빠를 따라 교도소에서 살다가 다시 아빠와도 아쉬운 이별을 하고 ECDC로 온지 2년 만에 출소한 아빠를 만나는 아이의 눈물을 맨정신으로 덤덤하게 찍을 프로듀서가 어디 있겠는가.
“프로페셔널 PD가 촬영을 하면서 우는 모습을 보니까 깊은 인간미를 느꼈어요”라며 KBS의 수요기획 다큐멘타리가 자신과 한국을 이어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제작진에 거듭 감사를 표했다. 방송을 보고 아이들에게 신발과 양말 등 아이들 용품을 보내주겠다는 사람들이 쇄도했고, “영어를 잘 못하는데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느냐”는 대학생들의 문의 이메일도 자주 받는다고 한다. 3일 충북 제천에 있는 대원대학교 특강 때도 여러 학생들이 울었단다.
“ECDC를 돕고 싶은 분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가능합니다. 우선 제게 이 메일(info@ecdc.org.np, pushpa_23@hotmail.com)을 보내 상의해 주세요. 네팔에 오셔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것도 좋아요.”
그녀의 개인 메일 주소에 숫자 23이 뭔지 궁금해 물어봤다.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입니다. 팬입니다. 중고교 학창시절 학교에서 농구선수였습니다. 그땐 좀 더 날씬했죠.”
서른둘의 그녀, 환하고 앳된 미소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