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의약품 가격 한국의 10배, 의사들은 해외병원에 취업’

감기약도 2시간 걸어야 구입…20페소짜리 진통제로 치통 견뎌

필리핀 바탕카스 마비니시 빈민촌에 살고 있는 자키(Jaky, 10세, 남)는 몇 년 전부터 다리와 팔이 심하게 가려웠다. 피부질환 치료제를 구입할 여건이 안 되는 자키군은 치료할 방법이 없어 밤마다 극심한 가려움증에 시달린 나머지 제대로 씻지도 않은 손톱으로 피부를 긁어댔다. 당연히 상처 부위는 점점 악화됐다.

급성 열경련으로 갑자기 수술을 받게된 필리핀 환자 필리핀 마닐라=윤희락때마침 한국 의사들이 마비니시를 방문, 의료봉사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 자키는 어머니와 함께 의료봉사자들이 있는 마비니 시청 앞 실내운동장을 찾았다. 내친 김에 기관지염을 앓고 있는 여동생(handy, 7세)도 데려 갔다.

그런데 단순히 피부질환을 치료받기 위해 이곳에 온 자키군은 한국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수술을 받지 못하면 눈이 실명할 수 있다”는 얘기. 위생상태가 매우 나쁜 환경에서 살다보니 3개월 전 어린 나이에도 백내장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의사는 “나이가 어리니까 수술을 받으면 완쾌할 수 있다”고 격려를 했다. 자키는 그러나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치료는 꿈같은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백내장 수술시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선에서 약 25만~35만원의 수술비가 들지만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는 필리핀 빈민가 아이들이 백내장 수술을 받으려면 수술비가 100만원(한국 돈)을 넘어간다. 의료봉사활동에서 간단한 수술을 하고 있었지만 인공수정체를 눈에 삽입하는 큰 수술을 불가능했다.

충치 치료비가 가정부 한 달 월급

충치 치료를 받고 있는 필리핀 치과환자 <필리핀 마닐라=윤희락 통신원>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마비니시를 방문한 제주도의사협회 소속 의사들은 자키 뿐 아니라 마비니시와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3000여명의 환자들을 돌봤다.

제주도특별자치도의사협회 김군택 회장(소아과)은 “필리핀의 의료서비스와 의약품은 매우 비싸 일반 저소득층 가구들은 병원에 갈 엄두조차 낼 수 없다”며 “아직 필리핀에는 빈곤층이 많기 때문에 누구다 나 이용할 수 있는 의료시스템 기반이 구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리핀 치과에서 충치 등을 치료하는데 진료비, 시술비, 약값 등을 포함하면 약 8만 원가량 든다. 8만원이면 필리핀 가정부의 한 달 급여 12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금액. 이 때문에 치료를 받을 수 없는 필리핀 환자들이 그저 20페소짜리 진통제를 먹으며 고통을 견디고 있는 신세다.

충치를 치료할 형편이 되지 않는 안데르센(Andersen, 24)씨는 “20페소(환화 550원)짜리 진통제를 먹어가며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가 한국의 치과의사 선생님이 충치를 제거해줬다”면서 거듭 “정말 고맙다”를 연발했다.

의료보험 낮은 보장수준 수술비 기대 못해

의료봉사단이 맞은 필리핀 환자들의 질병은 영양결핍이 주원인. 영양이 부족하면 면역력이 떨어져?피부질환과 기관지염, 충치, 감기 등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약을 복용하면 회복될 수 있지만 환경이 뒤따라주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송동훈 피부과전문의는 “의료시스템은 경제수준에 따라 발전한다”고 전제, “오늘날 필리핀은 1960~1970년대 한국의 경제여건 수준”이라면서 “당연히 이런 의료부족상황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필리핀에도 의료보험이 있지만 가입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저소득가정들은 쉽게 가입을 못한다고 한다.

또 진료비만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수술비와 약값 등은 개인이 지불해야 한다. 중요한 수술과 비싼 약을 살 수 없는 이들에게 이런 의료보험은 엄밀하게 말해 ‘의료보험’이라기보다는 ‘잉여보험’에 가깝다는 자조 섞인 지적이다.

필리핀 정부가 다른 방책으로 의료카드 ‘필헬스(Philhealth)’를 저소득층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5000페소 한도이기 때문에 수술비용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약값으로 지불하는 것으로도 벅찬 실정이다.

게다가 다국적 제약회사가 필리핀 의약품 공급시장의 약 75%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25%의 필리핀 제약회사도 의약품 제조에 있어 아직 원료와 화약약품을 95%는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약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2009년 상반기 세계보건기구(WHO) 발표에 따르면, 필리핀 민간 소매점에서 브랜드 의약품 가격은 각국 평균치보다 15배 넘게 비쌌다. 가장 싼 일반 브랜드 약품은 기준가격보다 6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급의료 인력들 해외 유출

의료봉사활동에 참여한 주부 김선주(39)씨는 “아들이 아파서 필리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한국에서 5000원이면 살 수 있는 약을 6만원에 샀다”며 “교민들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데 경제수준이 낮은 필리핀 빈민들이 어떻게 약을 구입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조찬현 외과전문의는 “암이 의심되는 환자가 있어 방사선(X-ray) 촬영과 양성?음성 조직검사 등을 해야 된다고 제안했지만 주기적으로 검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환자는 스스로 수술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조 원장은 “지난 의료봉사에서 30cm의 유방암 종양을 갖고 있던 환자가 있어 이곳에서 종양제거수술을 즉각 할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아울러 “오늘도 환자 중 한 40대 남성이 B형간염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간경화, 간암까지 이르게 됐고, 1~2달 정도밖에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진작 수술을 받았으면 치료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병원 등 의료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 만 명이 넘는 명문대 의대를 졸업한 필리핀 학생들이 간호사로 재교육을 받고 해외 취업을 하고 있는 것도 열약한 의료시스템의 원인 중 하나다. 이 때문에 필리핀 정부는 졸업 이후 2~3년간 해외진출을 법적으로 금지시키고 있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취업의 기회가 없는 이들에게 이와 같은 정책은 부당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필리핀 마비니시 보건소 마이라 가르시아(Myra Garcia) 소장은 “필리핀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매우 많이 있지만 병원 등과 같은 의료시설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치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할 수가 없다”고 전제, “필리핀 인재들이 해외 병원에 취업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정작 의료시스템이 더 많이 필요한 곳은 미국이 아니라 필리핀”이라고 긴 한숨을 쉬었다.

5년째 필리핀 의료봉사하는 한국인들

지난 25일 한국인 의료봉사단원들의 진료를 받기 위해 많은 필리핀 현지 주민들이 마비니 시청 앞 실내운동장을 방문,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필리핀 마닐라 =윤희락 통신원>

마비니시에는 1개의 종합병원과 보건소, 사립병원이 있지만 병원비가 비싼 편이고 보건소에는 고작 의사 1명과 간호사 2명이 환자를 돌보고 있어 일손이 부족하다. 또 제대로 된 의약품이 구비되어 있지 않아 환자들은 단순히 진찰만 받고 돌아가는 일도 부기지수라고 한다.

제주도의사협회와 필리핀수중협회는 지난 2007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5회째 의료자원봉사를 열고 있다. 올해 의료봉사에는 의사협회 14명, 필리핀수증협회 12명, 자원봉사자 20여명이 참여했고 필리핀 마비니 시청과 보건소에서도 25명의 직원들이 의료접수와 통역을 하는 등 손을 거들었다.

매년 약 3000만 원 상당의 의약품을 가져와 환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병원에서 직접 사용하는 장비인 초음파기, 치과기, 수술도구 등을 옮겨왔다. 수술이 가능한 환자는 현장에서 직접 수술도 했다.

필리핀 마닐라=윤희락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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