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 프로젝트의 전반부, 블라디보스토크 답사도 일정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답사일정은 빠듯하지만, 한나절을 활용해 현대 러시아인들의 휴일 일상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장소는 현지에서 추천한 블라디보스토크 남단, 루스키 섬이었다.
트래킹을 하며 내해 아무르만과 외해(동해/현지에서는 일본해로 부름 ) 우수리스크만을 조망하는 흥미진진한 일정이었다.

숙소인 시내 중심부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택시를 이용해 섬으로 들어갔다. 러시아에 와서 처음 타는 택시인데 운전사 나이가 60대쯤 돼 보인다. 어느 나라나 택시운전사는 시간에 쫓겨, 급하며 과속하기 일쑤다. 러시아라고 예외는 아니다. 무뚝뚝한 운전자는 시속 100Km로 날아 장엄한 루스키대교를 건너 40여 분 만에 트래킹 코스로 데려다준다.
안내인 현지교포 송 선생이 있었길래 망정이지, 스마트폰 번역기나 들이대고 이야기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저 멀리 내려놓고 가지 않았을까!!
루스키 섬은 소비에트공화국 시기에는 러시아 해군 요충지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섬이었다. 소비에트체제가 붕괴하고 들어선 푸틴 정권은 2000년대 들어 동방정책의 핵심지역으로 이 섬을 집중 개발했다. 2012년 섬과 블라디보스토크 육지를 연결하는 루스키대교가 개통되었고, APEC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섬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최고의 대학교인 러시아 극동연방대학교를 시내에서 이전시키고, 국가 과학기술센터를 유치했다.
2015년부터는 매월 9월에 ‘동방경제포럼’이 개최되어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 정상급들이 참석하는 국가 간 경제협력의 중심이 되고 있는 장소라 한다.
섬으로 이전한 ‘극동연방대학교‘는 블라디보스토크 중심부와 많이 떨어져 있고, 대중교통 편도 불편해 고립된 지역이었다. 학교 주변을 둘러봐도 민간 상업지역이나 건물이 없으니 교내에 머물러 공부만 하라는 뜻인 모양이다. 종교인들의 기도처도 아니고 재기 발랄한 학생들을 군대 막사처럼 섬에 고립시키니 과연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엘리트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루스키 섬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민들에게는 휴식을 하거나 여유를 즐기기에는 매우 가깝고 쾌적한 장소로 보물과 같은 장소였다. 광활한 자연이 보존되고 환경이 깨끗하며 공기와 햇볕이 유난히 상큼하다. 구릉형 수림 지대를 30여 분 헤쳐나가면 광활한 바다가 절벽 능선 코스가 나타난다. 바다의 절벽 위쪽으로 난 길을 걸어 섬의 끝단까지 걸어서 갔다가 돌아오는 왕복코스였다.

코스 입구에는 휴일을 맞은 젊고 발랄한 루스키(러시아인)들이 삼삼오오 배낭을 메고 담소하며 걸어간다. 착용한 옷과 배낭, 트레킹화가 서구의 명품이 아니더라도, 검소하게 평상복 차림으로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 더욱 수수로워 보인다. 매우 익숙한 휴일,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은 오랜만에 이방인에게 여유를 준다. 이 한적한 섬, 언덕을 올라서는 저 두 남녀는 어떤 사연을 품고 평화로운 이 섬에서 해변을 향해 걸어갈까?
마치 제주도 서남쪽 둘레길, 산방산에서 시작해 송악산으로 이어지는 ‘송악산 둘레길’을 연상케 한다. 검푸른 아무르 바다와 구불구불 언덕이 어우러지며,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어난 환상적 코스에 마치 남방 제주에 온 듯 착각을 일으킨다.
다만 지도로 된 관광지 현황판이나 안내판, 공중화장실이 없는 것이 흠이며 코스에도 안전시설이 미비한 것이 눈에 띈다. 공산주의의 폐쇄성과 비효율성이 잔류된 농약처럼 아직도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보는 것 같다.
한국의 화장실 문화 하나쯤은 벤치마킹해도 좋을 텐데..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화장실에 관한 한 한국을 따라올 나라는 없을 것이다.

코스 중간에 철제로 만든 망루(?) 같은 공작물이 녹슨 채로 서있다. 아마도 군사시설이 있던 시절 파수병이 망원경을 착용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탑이었을까? 아니면 민간 전망대로 설치한 것일까? 중국을 가면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았을 텐데.. 입장료를 받고 유료화하여 편의시설을 만드는 데는 중국을 따라갈 나라가 없다. ㅠ성공한 사회주의와 실패한 공산주의를 목격한다.

해변 언덕에 이 코스에서 유일한 안내판이 하나 서있다. 이 목제 안내판에서 내가 식별할 수 있는 글씨는 모스크바 9288, 세울(서울) 613이었다. 아마도 직선거리로 모스크바 9288Km 서울 613Km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북한 평양과의 거리가 아니라, 서울과의 거리를 표시해 놓은 것을 보면 이곳에 오는 방문객이 주로 대한민국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었다.

세계의 젊음은 모두 도전적이다. 역시 러시아의 젊은이들도 모험심이 강했다. 해안 절벽 위에 밧줄을 걸고 계곡 건너기 시도를 하며 구경꾼 모두들 환호를 보낸다. 이 섬이, 이 절벽이, 저 검푸른 파도가 모두 저들 젊음의 것이리라!
우크라이나 전쟁의 포성도, 파괴도 이 섬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젊음과 도전이 있을 뿐이었다.

절벽 포인트에 수줍은 소녀가 미소년을 기다리는 사랑의 몸짓으로 서 있다. 억지로 포인트를 만드는 한국의 청춘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도 순서를 기다려 이방인의 포부와 환희를 실어 바다로 날려 보내 본다. 역사의 미로를 벗어나 오랜만에 이국에서 맡아보는 싱그런 바다와 달콤한 바람의 향기였다.
3시간여의 트래킹을 마치고 다시 길가 도로로 나왔다. 컨테이너 박스에 차려진 스낵바에서 커피와 러시안 간편식을 사 먹으며 나를 실어 줄 택시를 기다린다. 여행자의 끝없는 자유가 부드럽게 내 몸을 감돈다.

오늘 블라디보스토크 출발을 기념하여 호텔 레스토랑에서 호사스러운 오호츠크해 킹크랩 파티가 기다린다. 삶이 고달프더라도 하루쯤은 샹들리에가 은은하게 켜진 매혹의 홀로 입장해야 한다. 흑해산 두터운 목재 테이블에 앉아 상큼한 화이트와인 한잔 걸치면 우리는 행복하나니…
석양이 오면 사람의 모양은 여유롭고 나른해진다. 긴장한 경계병의 차가운 눈초리는 저리 가거라! 금발이 펄럭이는 슬라브 아가씨들의 감미로운 춤과 함께 러시아 가요 ‘백만송이 장미’가 울려 퍼진다.
오! 블라디보스토크, 아름다운 극동의 항구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