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세계

[이택순의 아무르 답사 23] 하바롭스크, 야망의 개척사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중국 하르빈으로 연결되는 교통요지 우수리스크역에서 잠시 정차한 후, 밤의 적막을 뚫고 대륙의 땅을 밤새 달렸다. 간간히 정차하는 중간역도 명멸하는 푸른 등불 이외에 인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식당 칸 레스토랑을 방문해 보았으나 우크라이나 전쟁의 탓인지 손님이 별로 없다.

혹시나 우수리강이 보일까 서쪽 창을 응시했지만, 어둠속에 보이는 것은 적막속의 수림뿐이었다. 야간열차 이동이 여행일정을 편하게 해주지만 조망은 많은 제약을 주었다.

블라디크-우수리스크-하바롭스크 구간

시베리아 횡단열차 우수리구간(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은 착공 6년만인 1897년 1월에 완공되어 대륙의 동쪽은 교통여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1900년대 들어 러시아 국적 한인(고려인)과 조선에서 망명한 독립투사들은 육로로 또는 열차로 이 구간을 이동하며 대일항전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1918년부터 1922년 시베리아 내전 기간중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과 혁명에 반대하는 백위군을 상대로 곳곳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비록 러시아영토였기는 했지만 대 일본군 전투는 조선독립투쟁의 일환이었다.

블라디보스톡 거리의 침략 일본군

수많은 무명의 독립투사들이 대륙의 차가운 땅에서 소리없이 산화한 것이다. 후일 이념이 갈라져 평가가 달라지지만, 이들의 투쟁은 조선독립을 위한 비장한 각오와 항일의지의 표현이었다는 데에 역사는 일치하고 있다.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일본 육사 출신 독립투사 김경천과 지청천도 만주에서 유전하며 이곳 아무르강 연안으로 흘러오게 된다.​

열차는 부근을 통과하고 있다. 이곳에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유명한 항카호수(중국어 싱카이호/흥개호)가 소만 국경지역에 걸쳐있다. 북만주의 독립군 부대가 연해주로 입국할 때 이동하고 주둔하는 루트다.

헝카호, 봉밀산, 한흥동 요도 <도산 안창호기념관>

그리고 이곳에 봉밀산(미산)의 독립운동기지한흥촌(한민족이 흥하는 마을)’ 도 인접해 있다. 한흥촌은 신민회를 이끌던 이상설, 이동휘, 안창호 선생 등이 꿈꾸던 병농일치의 군사기지였다. 이들은 북만주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이며, 토지가 비옥한 밀산(미산)의 접경지대 봉밀산 근방의 토지 1백만평 이상을 구입했다. 조선과 미주교포들로 모은 성금이었다.

​1백여 가구의 한민족 청년들을 이주시켜 거대한 독립운동의 기지를 만들려 한 것이다. 재정적으로 자립하여 투쟁자금을 모으려 했다. 중등학교를 설치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이 학교를 바탕으로 독립군 사관학교로 발전시킨다. 독립투쟁의 간부요원을 육성하며 기회가 되면 한반도로 진군한다. 일본군을 무력으로 괘멸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자주적 무장독립투쟁의 원대한 구상이었다.

젠틀맨이며 혁명가로 평가되는 도산 안창호 <사진 안창호기념관>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런 면에서 강온 양 전략을 가진 실천가였다. 하지만 냉한기가 너무 긴 척박한 기후로 농산물 수확은 미흡했으며, 러시아 당국의 비협조와 일본의 자금 차단으로 무산되고 만다.

​사실 러시아와 북만주의 광활한 토지에 비해 볼 때 1백만평은 그리 넓은 땅도 아니었다. 1990년대 소비에트체제 붕괴 이후, 한국의 재벌과 대기업들이 식량안보 차원에서 1천만평 이상의 대규모 농업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혹한의 기후와 노동력 부족, 거대한 자본 소요로 인해 타산이 맞지 않아 답보상태이거나, 철수하는 실정이다. 100년 전의 상황은 더욱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가 된다.

하바롭스크 역사, 외형은 블라디보스토크 역사처럼 수려하다.

열차는 달려 다음날 새벽 6시에 하바롭스크 역에 도착했다. 어슴프레 어둠이 머물고 있는 하바롭스크 역사 앞에는 거대한 동상이 도착하는 승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바롭스크의 개척사를 만든 탐험가 ‘예로페이 하바로프((Ерофей Хабаров,1600-1671?)’의 동상이었다.

하바롭스크는 러시아 동방개척의 전초도시로 ‘시베리아의 파리’ ‘극동의 수도’라 불리우는 극동 최대의 유서깊은 도시이다. 북위 48.3도의 한대 지역에 위치한 하바롭스크는 원래 우수리강과 아무르강(흑룡강=헤이루쟝)이 합류하는 아시아대륙 동쪽의 외곽 지대 불모지역이었다.

원주민은 여진족과 말갈족에서 떨어져 나와 반유목 생활을 하는 야인(나나이족)이였다. 이들은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여진족과도 분리된 인종으로 청나라도 사실상 방치하는 땅이었다.

하바로프 동상, 역사 광장에 있다

러시아 북부지역에 코자크 출신의 상인으로 모피무역으로 큰 돈을 번 예리페이 하바로프(1600-1671?)라는 야망가가 있었다. 하바로프는 시베리아 동남쪽 아무르강(흑룡강)유역에 모피와 금, 비옥한 토지가 많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1649년 ‘아므르강 원정탐험대’ 를 구성하여 시베리아 남쪽 아무르강 유역으로 진출하고, 1653년에는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지점에 캠를 설치한다. 이곳이 현재의 하바롭스크 지역이다.

​러시아제국의 묵인 하에 약탈상인에 의한 영토 개척이 시베리아와 동방진출 방식었다. 상인이라지만 그들은 용맹한 코자크 기병대와 총포를 보유한 정규군 수준의 용병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탐험 과정에서 비무장의 원주민에게 가혹한 약탈과 살육을 행하며, 개척지를 광속으로 확장해나간다. 상인들의 개척지가 곧 러시아제국의 영토가 되는 식이었다. 상인들은 큰 돈을 벌고, 국가는 영토를 확장하는 일거양득이었다.

하바로프의 남진과정에서 러시아 상인 무장세력은 강력한 신흥강국 청나라와 충돌한다. 청나라가 전투에서 열세에 놓이며 조선에 응원군을 요청한다. 1654년과 1658년 조선에서 북벌을 기획하며 육성하던 함경도의 정예총병 200명을 파병하여 아므르강 상류 알바진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때 러시아군이란 정규군이 아니라 상인 하바로프원정대 예하의스테파노프부대(무장탐험대)‘라 명명된 용병부대였다. 사령관 스테파노프는 전투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다. 러시아(무장탐험대)는 아무르 유역에서 물러나고 청나라의 영토가 보전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청나라에 복수(북벌)하기 위하여 만든 조선의 소총부대였다.

이 병력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 병력을 물리치고 아무르강 유역을 사수하는 대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정벌(러시아 정벌)이라 말한다. 아무르의 역사에 한민족이 출현한 것이다.

​이후 1689년 체결한 네르친스크조약에서 스타노보이산맥(외흥안령산맥)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영토, 남쪽 아무르강(흑룡강 유역 전체)과 하바롭스크는 청나라의 영토로 공인되었다. 강력한 전제군주들인 청나라의 강희제와 러시아의 피터대제의 통치 하에서 중국-러시아 두 국가는 힘의 균형을 이루며 약 170여년간 이 국경이 유지되었다.

​19세기 들어 국제정세의 패권은 완전히 서양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로 급속히 성장한 서구 열강은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동양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반면 청나라는 내정의 실패와 부패로 국력이 약화되고 내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청나라의 국정실패는1850년대 들어 태평천국의난으로 더욱 위기에 처한다. 동북부 불모지인 아무르강(흑룡강, 헤이룽장) 유역은 관심을 둘 수 없어 방치된 상황이었다.

​1847년 나이 38세에 러시아의 동시베리아총독으로 부임한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는 국제정세에 탁월한 전략가였다. 청나라가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흔들리자, 1850년부터 야금야금 아무르강 북쪽 연안을 무단 점령하기 시작했다. 약탈상인 하바로프가 공략했던 땅, 하바롭스크와 아무르하구 니콜라옙스크 연안까지 태평양으로 진출했다. 청나라는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비하느라 동북방 지역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불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했다. 러시아와 미국이 중재하여 1858년 북경에서 조약을 맺고 영불 연합군의 철수를 주선했다. 이를 중재한 대가로 러시아는 1858년 아이훈조약(러-청 국경조약)을 체결하고 아무르강(흑룡강 /헤이룽장) 북쪽의 연안의 광활한 땅을 모두 획득하였다.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합류지점. 연안 맞은편이 중국

청나라의 국력쇠퇴와 지도층의 국제안목 결여로 한반도 전체보다 넓은 크기의 땅이 러시아에 합법적으로 양도 된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뼈아픈 실책이라 할 수 있다. 아이훈 조약 직후 시베리아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의 명으로 군사기지가 건설되었고,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하바로프카’로 명명되었다. ‘옐로페이 하바로프는 극동을 발견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하바롭스크 역 정면에 웅장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국제관계는 암흑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며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예나 지금이나 여실히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베네수엘라에서 전쟁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약소국의 생존전략은 무엇인가?

시베이아횡단열차 식당 칸의 필자. “국제관계는 암흑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며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예나 지금이나 여실히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베네수엘라에서 전쟁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약소국의 생존전략은 무엇인가?” 필자가 아무르 답사 내내 간직했던 질문이다.

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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