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도장 깨기] 야스퍼스와 하이데거

야스퍼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에 타계함으로써 생몰연도도 비슷한 카를 테오도르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1883~1969년)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년)는 실존주의 철학을 창시한 같은 독일 철학자라도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야스퍼스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오고 단련했던 사람이고, 하이데거는 양지를 좇아 안온한 삶을 누리려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인격적 차별성을 나타내는 철학자라 하겠다.

먼저 니더작센 주 올덴부르크 출신의 야스퍼스. 원래 정신병리학자였던 그는 과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실존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철학자로서의 입문 동인이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했다. 하이델베르크대 법대에 입학한 야스퍼스는 곧바로 의대로 전과해 25세에 의사 면허를 딴다. 그러나 의사 시험 합격 후 하이델베르크 정신의학교실에 머물던 그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인 막시밀리안 막스 카를 에밀 베버(Maximilian “Max” Carl Emil Weber)의 중개로 심리학자로서 철학과에 들어간다. 그러다 폴란드 그단스크 출신의 하인리히 욘 리케르트(Heinrich John Rickert)가 베버와 자신을 업신여기는 데 분기탱천,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맘먹는다. 철학부 주임교수인 리케르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겨서 정원 외 교수라는 굴욕을 당하면서도 철학과에 끼어들었다.

그의 절차낙마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바로 이듬해 철학 제2강좌의 주임교수로 리케르트와 동등한 위치에 도달한다. 그 후 10여 년 그의 주저主著인 <철학> 3권을 출간, 실존철학을 완성하면서 그의 명성은 독일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대학시절 동기였던 유대인 친구 누나인 4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한 그는, 유대인 부인을 둔 죄(?)로 갖가지 불이익을 받는다. 나치가 집권한 1933년 이후 그의 삶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 당당한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과 주임교수이면서도 모든 학교행정 업무에서 배제된다. 몇 년 후배인 하이데거가 나치당원 자격으로 프라이부르크대 총장에 취임하는 등 승승장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말이다.

급기야 1937년 여름 학기 종료 직전 휴직을 통보받는데 사실상 면직이었다. 이제 선택은 둘 중 하나.  이민을 가든지 아내와 이혼을 하는지. 하지만 야스퍼스는 이민을 가지도, 이혼도 하지 않았다. 어떤 고난이 와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서서히 학문의 꽃을 피웠다. 1945년 5월 7일 드디어 나치가 두 손을 들었다. 야스퍼스에게 재기할 기회가 다시 온 것이다. 그는 교수 13명을 규합, 대학 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학 개혁에 착수했다.

야스퍼스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받은 불이익을 “히틀러가 나에게 부여한 8년간의 휴가”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 기간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후기철학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한편 그의 연구가 물이 오를 대로 오르자 그는 오만과 고립의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다른 이들의 연구나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독불장군, 스스로를 차단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는가는 대외 활동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948년부터 스위스 바젤대로 옮겨 지내던 20년 동안 외부 활동이라곤 영화 한 편, 연극 한 편, 그것도 제자들이 올린 무대라 봐 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한 실존철학자라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은, 현역 시절은 물론 은퇴하고 나서까지 매일 몇 시간의 철학 연구를 규칙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

그에 반해 외모만은 도골선풍(道骨仙風)인 바덴 주 메스키르히 출신의 하이데거는 출발부터 해바라기 성향을 보인 인물이다. 그는 그의 유려한 스키 실력만큼이나 확고한 철학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나치가 집권하자 스스로 당원이 되었다. 나치 정권 아래서 출세 가도를 달리겠다는 뜻을 확고히 한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도 한방이 있는 선수였다. 그는 무신론적 대표 철학자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을 화두로 진하게 한 건 했다.

3부작으로 기획했으나 1부 2절에 그쳐 비록 미완성이었지만, 아주 먼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해 그가 “존재에 대해 무식쟁이”라는 주장으로 주위를 환기시킨 다음 자신의 학설을 설파함으로써 낙양의 지가를 올리려 했고, 그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등 선배들을 “독단적”이라고 몰아세움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 했다.

그러면서도 후설의 이론을 상당 부분 수용, 또는 인용하는 모순을 범하기도 하는데, 이는 결국 그가 데카르트를 수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후설은 현상학적 입문서로 <데카르트적 성찰>을 저술했을 정도로 ‘데빠’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의미에 대해 상당히 깊은 성찰을 해 왔다. 결국은 그 깊은 성찰 덕분에 실존주의의 양대 거두 중 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의 접근은 처음부터 난해, 그 자체였다. 예컨대 이랬다.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바로 그것, 존재자가 이미 그것으로 이해되어 있는 바로 그것이다”라는 복잡한 명제 규명으로 일반인뿐 아니라 철학도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편 그는 상당히 재밌는 시도를 하였던 바, 존재에 대한 연구에 천착하는 과정에서 빈센트 윌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라는 존재를 만나 존재 규명에 나서는 파격을 선보인다. 즉, 고흐의 ‘구두’라는 작품을 소재로 새로운 회화론을 주창하였는 바, 이는 그의 단골 메뉴인 예술철학론의 시원이 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서양 철학에 있어 동갑내기 루드비히 요세프 요한 비트겐스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과 함께 서양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꼽히게 됐다.

[참조] 강성률 著 푸른솔 刊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1>, 서동욱 엮음 문학과지성사 刊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임선희 著 최복기 畵 주니어김영사 刊 <만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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