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철학자 도장 깨기] ‘미묘한 라이벌’ 헤겔과 쇼펜하우어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생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0년)은 이마누엘 칸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등의 독일 관념론 철학을 계승하여 완성시킨 철학자다. 논리학, 법철학, 역사철학, 미학, 종교철학을 아우르는 거대한 체계를 구상해 후대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
헤겔은 또 전통철학의 완성자이자 현대철학의 비판적 출발자이기 때문에, 전통철학을 공부하든지 현대철학을 공부하든지 헤겔을 모르고서는 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특히 현대철학자들은 헤겔 철학의 비판적 해석을 통해서 자기 철학의 정당성을 마련하고 있어(예; 카를 마르크스), 헤겔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이야기 자체를 이해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현대철학에 깊이 다가가기 힘든 것이다.
궁전 하급 세무 공무원인 게오르크 루드비히 헤겔과 마리아 막달레나 루이자 헤겔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 태생이었다. 열한 살 나던 1781년, 말라리아로 어머니를 잃게 된다. 그때 말 더듬는 습관도 생겼는데, 훗날 그의 눌변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김나지움에서 줄곧 수석을 차지한 그는, 계몽주의에 매료돼 물리학과 수학에 매진하기도 했다. 1788년, 신학 공부를 위해 튀빙겐대에 입학했으나 신학부의 엄격한 규율과 수준 낮은 강의에 흥미를 잃는다. 다행스러운 건, 훗날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이 되는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친해졌고, 2년 뒤엔 5살 어린 천재 셸링이 입학했다는 사실이다. 셋은 철학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자유와 자발성을 강조하는 칸트류의 철학에 마음을 뺏겼다. 이들은 모두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이델베르크대 교수직을 지원했으나 라이벌인 야코프 프리드리히 프리스에게 빼앗긴 후 극심한 우울증 상황에서, 헤겔은 오히려 그 역경을 뛰어넘어 철학사에 길이 남을 책 <정신현상학>을 1807년에 발표한다. <정신현상학>은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어 준 출세작이자 그를 대표하는 저술이 된다.
한편, 잠시 뉘른베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의 교장을 지내기도 했던 헤겔은 학생들에게 예비 철학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도 담당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철학 수업에서 김나지움 학생들에게 논리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수업 내용과 그 동안의 생각들을 바탕으로 <논리의 학> 제1권을 1812년에, 제2권을 1813년, 제3권을 1816년 차례로 출간했다. 헤겔에 따르면, 논리학은 모든 철학을 작동시키는 기초이면서 자기 자신을 자율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획이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 체계의 핵심을 <정신현상학>이 아닌 <논리의 학>으로 규정한다.
헤겔의 높아진 평판과 지속적인 노력 덕분에 1816년 마침내 하이델베르크대 교수가 되고, 2년 뒤엔 프로이센 문화부 장관인 알텐슈타인의 천거로 베를린대(현 베를린 훔볼트대) 교수로 간다. 거기서 국가들이 어떤 헌법을 가져야 되는지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법철학 요강>을 1820년 발표한다. 이 책에서 헤겔은 ‘자유 자체에 대한 인간의 신념이 어떻게 국가와 법에 의해 조건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이듬해인 1821년 쓴 저서 <대논리학>에선 그 유명한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논리를 천명한다. 그것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고 말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명쾌한 논리였다.
베를린대에서 헤겔의 인기는 거의 아이돌 급이었다. 그만큼 그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철학, 예술철학 등의 강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의 강의 내용은 베를린대의 건물 벽이나 담장에 분필이나 연필로 헤겔의 말들이 적혀 있을 정도였다. 그의 눌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헤겔의 생일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읽고 화를 냈다. 자신의 생일파티에 대한 보도와 비교해 헤겔의 그것에 너무 많은 지면을 차지했다는 이유였다.
1830년에는 드디어 베를린대 총장으로 선출된다. 모든 대학을 감독하는 정부의 전권대사로도 임명된다. 그러나 이듬해 위장병과 빈혈 등 합병증으로 별세한다.
헤겔 하면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변증법이다. 독일 관념론에서 이성(Vernunft‧理性)은 합리적 사고의 이성만이 아니라 신이 창조하고 주재하는 이 세상의 신적인 질서까지 포섭하는 인식론을 말한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현실적인 것은 그렇기에 곧 이성적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절대지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에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타자, 즉 부정성은 그 존재 자체가 말소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양(Aufheben‧止揚)을 통해 변증법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단순히 ‘정반합’ 수준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 여기에 있다. 즉 단순히 A+B=C와 같은 변용이 일어난다는 게 아니라, 인식론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사회의 관계, 사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모두 다 그와 같은 불완전한 부정성을 포섭하여 발전해나가는 진취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발전을 위한 ‘포섭’을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하여 왔지만, 최근에는 ‘부정성’의 개념에 포착하여 다시 헤겔이 부각되고 있다. 헤겔이 스스로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 철학 연구는 결과를 완성해내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과 운동인 것이다. 넓게 보면 결국 헤겔의 비판자들 또한 헤겔에 이미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1860년)에 관해 얘기할 차례다. 쇼펜하우어는 동시대를 살았던 헤겔이란 존재 앞에서 평생 열등감으로 몸부림쳐야 했던 불운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쇼펜하우어는 대를 이어 상인으로 키우려는 부친의 소망을 뒤로 하고 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어받았다고 확신했다. 또한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는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 출간하였다.
그는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재야에서 줄곧 독자 연구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소품과 부록>이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의 서적들은 주장이 굉장히 명쾌하다. 앞서도 밝혔듯이 헤겔이 현학적인 문장으로 읽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 반면,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명료하고 지시성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독일어권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최고급 산문이자 탁월한 문학적 글쓰기로 평가받는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그의 책을 읽고 “독일어 글쓰기의 진수”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서문에서 헤겔과 헤겔학파에 대해 맹비난한다. 그밖에도 자신의 책 곳곳에서 마치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듯 헤겔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기르던 반려견의 이름을 ‘헤겔’로 지었을 정도다.
여기엔 헤겔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과 열등감이 존재하고 있다. 우선 쇼펜하우어는 헤겔이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의 강사로 응시했으나 그로부터 팽 당한 원한이 있다. 게다가 헤겔과 함께 재직하게 된 베를린대에서 그가 개설한 강좌가 파리만 날리다가 결국 정원 미달로 폐강된 것과 달리 지루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헤겔의 강의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비정상적 상황에서 쇼펜하우어가 분기탱천했던 것은 어느 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쇼펜하우어는 평생을 ‘헤겔 저격수’로 지내게 된다.
칸트의 후계자로, 비슷한 시대를 살면서도(<정신현상학>은 1807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1819년으로 불과 12년 정도의 차이다) 이 두 사람의 철학은 거의 반대지점을 향하고 있으며 한쪽은 상대를 ‘사기꾼’이라 비난하고 한쪽은 ‘모순 덩어리’ 정도로 폄하하고 있다. 특히 헤겔이 보기에 주관적 관념론은 일단 외부의 충격이 먼저 있어야 표상이 생겨난다는 측면에서 보면 표상이 먼저 일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도 없이 추상적인 개념을 진리라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진리는 추상적 개념뿐만 아니라 실재 내용도 ‘온전히’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저력은 만만치 않다. 작년 말 서점가에서 ‘쇼펜하우어 특수’가 반짝했었다. 지난해 12월 1일 발표한 온라인서점 교보문고의 11월 마지막 주간 베스트셀러를 보면 1위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4위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14위가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로 온통 쇼펜하우어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현대인들이 마음을 사로잡은 원인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인생 전반에 관한 철학적 관점을 다룬 <소품과 부록>을 재해석해 다듬은 책자들이 이들의 심금을 울려 서가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생명이 근원적으로 지닌 역동적인 힘을 믿었으며 이성과 과학으로는 삶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힌두교와 불교 같은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를 유럽에 처음 전파한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고 말하면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리적, 심리적 해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쇼펜하우어의 책이 잘나간 또 다른 이유는, 그의 문장 스타일 덕분이기도 하다. 헤겔의 책은 철학 전공자들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한 데 반해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명료하고 정확하다. 이 같은 그의 언어철학적 입장은 20세기 최고의 언어 철학자이자 분석 철학자인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참고한 서적]
강성률 著 푸른솔 刊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1>
강순전 著 김양수 畵 삼성출판사 刊 <정신현상학>
박은미 著 박태성 畵 삼성출판사 刊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著 김욱 譯 지훈 刊 <철학에세이>
쇼펜하우어 著 홍성광 譯 을류문화사 刊 <행복론과 인생론>
위르겐 카우베 著 김태희‧김태한 譯 필로소픽 刊 <헤겔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