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도장 깨기] 노장(老莊) 대결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도교(道敎‧Taoism)는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중국의 민족 종교로, 신선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도가(道家)철학을 논리적 근거로, 거기에 불교를 가미하여 성립된 종교다. 중국 본토는 물론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까지 전파되었다.

도가사상은 인간의 현실적 타락과 무지의 근원을 척결하고, 자연의 실상을 깨달아 무위의 삶을 추구하는 철학사상이다. 무위자연 사상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도가의 대표적 사상가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노담(老聃)과 장주(莊周)라는 사실은 이젠 중학생도 알만큼 상식이 되어버렸다. 2백여 년을 격(隔)한 세기 차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사상을 설파한 두 사람의 사고의 기반은 어디서 온 걸까?

우선 도가사상은 중국사상의 여명기인 춘추전국시대 이래 유가(儒家)사상과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다. 자신의 철학을 시로 표현한 노자나, 조삼모사(朝三暮四) 같은 짧은 우화로 자신의 사상을 나타낸 장자가 여타 동양철학자들이 해내지 못한 특이한 접근법을 구사한 것이다.

노자 도덕경

노자 하면 대표적 저술이 <도덕경>이다. 지상의 저술 중 성서 다음으로 주석서가 많아 총 1500여 권에 이르며, 현존하는 주석서만 350여 권에 이른다. 독일 철학자 본 슈테릭히(Won Sterich)는 “세계에 단 세 권의 책만 남기고 불태워 버려야 한다면 <도덕경>이 그 세 권 가운데 들어야 한다”고 했을 정도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 철학자 마이클 하트(Michael Hatt)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순위>에서 중국에 존재하는 광활한 문자의 숲, 책의 바다 속에서 외국에 널리 소개되고 번역되어 읽히는 한 권의 책이 바로 2천 년 전에 쓰인 <도덕경>”이라고 설파했다.

따라서 ‘노자=<도덕경>’, ‘<도덕경>=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도덕경>의 저술에 관해선 재밌는 일화가 있다. 스스로의 재능을 숨겨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어 지내다 서쪽을 향해 가던 중 그를 알아본 함곡관(函谷關) 관령(關令) 윤희(尹喜)로부터 반강제에 가까운 가르침의 청탁을 받고 죽간(竹簡)에 써준 5천 자의 글이 바로 <도덕경>이란 것이다.

그럼 <도덕경>이 설파하는 요지는 뭔가?
“사물에 이름을 붙여서는 본질을 표현할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만물이 인식의 대상이 되어서 본질을 볼 수 없다.”

마치 20세기 철학자 미셸 푸코가 파이프 그림을 놓고 말했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처럼, ‘나무’라는 단어는 나무가 나무일 뿐이라는 걸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 실제 나무와 우리의 관계나, 나무가 하는 많은 역할을 무시하게 한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 추상화 하는 것은 오늘날의 과학을 이루는 기본이 되었다. 반대로 깊은 이해와 올바른 판단을 잃어버리게 했다. 세상 사람들이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은 관념 속에서 꾸며진 것이다. 진실로 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세상과 사물의 본질에 천착하라는 근엄한 충고로 들린다.

<도덕경>의 81장 중 가장 유명한 것은 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이하 절일 것이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만물과 다투지 않고, 모든 이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무른다, 그래서 도에 가깝다. 그에 맞는 낮은 곳에 머물고, 마음은 깊고 고요하게 쓰며, 어진 것과 함께 하며, 말은 신뢰 있게 하고, 다스리는 것은 바르게 하고, 일은 능력에 맞게 하고, 움직이는 것은 때에 맞게 한다. 무릇 다투지(자신의 낮은 위치에 관해서) 않으니, 흠이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유력 노자 연구가인 야오간밍(姚凎銘)은 자신이 저술한 <노자강의>에서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로 제 16강의 ‘致虛極沒身不殆(치허극몰신불태)’ 즉, “비움이 지극하면 죽는 날까지 위태롭지 않다”를 강조했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중국인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데도 우울증과 고의적 자해(자살)가 급증하고 있는데 착안, 비움과 고요를 즐기는 것이 최고의 생존 지혜라는 노자의 권유를 예시한 것이다. 이처럼 2500여 년 전 한 철인(哲人)의 혜지(慧智)가 오늘날도 절묘하게 적용이 된다는 점에서 노자의 존재가 크게 와 닿는다 하겠다.

그 증좌는 또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공자(孔子)가 친히 노자를 찾아와 예에 관하여 자문한 것. 당시 30대로 이미 어느 정도 대인의 반열에 오른 노나라 사람 공자가 멀리 주나라 수도 뤄양(洛陽)까지 찾아와 노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실은 그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 하겠다.

장자 <사진=위키피디아>

이제 장자를 살필 차례다. 장자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일화, <장자-내편> 제1편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대붕(大鵬)과, 제2편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일 것이다.
“북쪽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둘레의 치수는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바다로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다.-(중략)-메추라기가 대붕이 나는 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서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 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곧 장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협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 모든 우주 만물의 저절로 그러한 상태인 도를 따르라는, 흔히 이야기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창한 것이다. 차별적이고 유한한 인간 세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의 무한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는 ‘소요유의 단계’에 도달하면 무위자연의 진리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장자가 어느 날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비가 되어 신나게 날아다니며 자연을 만끽했는데, 잠시 쉬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보니 인간 장자라는 것을 알았다. 장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도대체 본래 인간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되었던 것이다.

장자는 여기서 바로 도가사상의 본질을 깨달았다. 인간도 역시 모든 우주 만물 속의 하나의 객체로 인정한다면 나비이든 사람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만물을 가지런하게 생각하는 도가의 ‘만물제동(萬物齊同)’사상이며 또한 장자가 주창한 제물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쳇바퀴 돌 듯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현대인들로서는 호접몽이 가끔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의 시간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장자는 또한 곳곳에서 ‘무용지용(無用之用)’, 곧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이 외형만 보고 무시하는 절름발이나, 꼽추, 언청이 같은 불구자를 들어 그들의 입을 빌려 도를 말한다. 이들이야말로 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역설적 우연을 통해 장자는 외형적인 모습에 구애받고 그것을 꾸미는 데 집착하는 세속 인간들의 슬픈 어리석음을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장애인들이 절대자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과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의 혜안을 볼 수 있다.

그가 만난 기인 혜시(惠施)와의 인연도 빠지면 서운하다. 혜시는 <장자>에도 20번 이상 등장하는 고향 친구다. 송나라 출신의 정치인이자 사상가로 위나라가 주 활동지이며, 혜왕(惠王) 때 재상이 되었다. 혜왕 당시 위나라는 누차에 걸친 전쟁 패배로 쇠약해져 갔다. 그는 강대국 진나라의 위협에 대항해서, 위나라 제나라 초나라가 연합해서 진나라와 맞서는 합종(合縱:세로 연합)을 주장했다. 연횡(連衡:가로 연합)을 주장하는 장의(張儀)와 불화하여 위나라에서 쫓겨난 뒤에 초나라로 갔다가, 고향인 송나라로 되돌아갔다. 이 때 장자와 벗이 되어서 철학을 토론했다. 장자 사상의 핵심 골격은 바로 혜시의 이론에 근거한다. 혜왕이 죽은 뒤에 장의가 권력을 잃었다. 이에 혜시가 다시 위나라로 복귀해서 합종책을 추진했다.

앞서도 살폈듯이 흔히 노자와 장자를 한데 묶어 노장(老莊)사상이라 부르곤 한다. 하지만 노자와 장자 사이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노자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었던 비해, 장자는 스스로의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몰두하였다. 즉 노자가 세상을 구하기 위한 무위자연에 처할 것을 가르쳤던 반면, 장자는 속세를 초탈하여 유유자적하고자 하였다.

노자가 자연의 원리와 그 응용을 가르쳤다면, 장자는 천지와 일체되는 원리를 설파하였다. 이것이 노장사상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참조] 강성률 著 푸른솔 刊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2>, 노자 著 김원중 譯 <노자 도덕경>, 박홍순 著 한빛비즈 刊 <장자처럼 살라>, 야오간밍(姚凎銘) 著 손성하 譯 김영사 刊 <노자강의>, 왕보(王博) 著 김갑수 譯 바다출판사 刊 <장자를 읽다>, 우연정 著 조민경 畵 <노자와 장자가 들려주는 ‘도’ 이야기>, 장자 著 오현중 譯 홍익 刊 <장자-內篇>, 조광수 著 함향 刊 <나는 자유-나림 이병주 문학과 아나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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