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11월 감사의 계절 ‘성육신’

세리(稅吏) 삭개오는 자기의 죄를 제사장에게 고백하며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회개를 끝내고 배를 쓸어내리는 ‘회개의 고르반’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기 탓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피해액의 4배나 갚아주었다(누가복음 19:8). 이것이 진실하고 온전한 회개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예물이 이웃에 대한 감사의 의무를 면제하지 않는다. 사진은 베르나르도 스트로치(1581-1644) 작 ‘삭개오의 개종’

수확철 끝무렵인 11월은 감사의 계절이다. 추수감사절의 성서적 기원은 ‘수코트'(​סוכות)라는 초막절(草幕節)이다. 옛 유대인들은 초막절 성전에 빈손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제단에 바치고(레위기 23:37~38), 그 제물을 이웃과 함께 나눴다(신명기 16:13~15). 나눔과 사랑의 화목제(和睦祭), 이것이 공동체의 추수감사절이다.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내가 배고프다고 너희에게 달라고 하겠느냐? 온 누리와 거기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것 아니더냐? 내가 숫소의 고기를 먹으며 숫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편 50:9∼13). 하나님이 원하는 감사는 제물이 아니다. 우리들 서로의 나눔이요 사랑이다.

​감사는 겸손한 인격에서 솟아난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를 알지 못한다. 감사할 일이 생겨도 자기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인다.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올 리 없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처벌할 법은 없다고 한다. 감사를 모르는 삶, 불만과 욕망으로 가득 찬 탐욕의 인격 자체가 이미 징벌이기 때문이다.

불만과 욕망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꿈틀거린다. 교만과 탐욕과 비교의식은 감사의 통로를 가로막는다. 교만, 탐욕, 비교의식을 떨쳐버린 가난한 영혼만이 감사의 자리를 펼 수 있다.

​변변찮고 보잘것없는 작은 것에서 놀라운 신비를 발견하는 가난한 마음이 감사의 무릎을 꿇게 한다. 감사는 물질적인 것이기 전에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사를 ‘영혼의 양식(糧食)’이라고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는 감사를 ‘영혼의 꽃’이라 했다.

이미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을 바르게, 제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감사의 자리로 이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탐내는 결핍의식이 감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누리는 것들은 과거 어느 한때 우리가 애타게 갈망했던 것이었다. 만약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그것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을 것인가? 그 갈망을 잊지 않는다면, 감사는 오늘의 마땅한 일이다.

​숨 쉬는 것, 잠들고 깨어나는 것, 만남과 헤어짐… 우리들 삶 자체에 기적 아닌 것이 없다. 그 기적을 베푼 손길에 고마워할 줄 아는 깨우침이 티없는 감사의 기도를 낳는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의 평범한 기적들에 감사하는 삶, 그 신비로움에 경탄하는 눈길을 잃어버렸다. 감사 없는 기도는 기복(祈福)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는 기도의 알맹이다.

그렇지만 감사의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군가 어떤 곤경을 만났을 때 다른 이의 도움으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마땅히 도움을 준 사람에게 정중한 감사의 뜻을 나타내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면 그만’이라는 고르반(קָרְבָּן)의 관습을 지키면서 제 부모에게는 아무것도 해 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물려받은 전통으로 하나님 말씀을 헛되게 하는 일이다.”(마가복음 7:11) 예수의 질책이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고는 ‘이제 내 할 일 다 했다’며 손을 털어버리고 정작 부모나 이웃에게는 마땅한 도리를 하지 않는 자들을 예수는 꾸짖었다. 고르반 관습을 핑계로 자기의 마땅한 의무를 회피하는 것은 신앙을 가장(假裝)한 불신앙이요, 제물을 악용하는 죄악이라는 가르침이다.

세리(稅吏) 삭개오는 자기의 죄를 제사장에게 고백하며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회개를 끝내고 배를 쓸어내리는 ‘회개의 고르반’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기 탓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피해액의 4배나 갚아주었다(누가복음 19:8). 이것이 진실하고 온전한 회개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예물이 이웃에 대한 감사의 의무를 면제하지 않는다.

​초막절의 감사에는 화목제의 나눔이 따른다. 성전에 제물을 바친 뒤에 그것을 이웃과 함께 나눴다. 그런데 예수는 아예 그 순서마저 뒤집는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네 형제가 너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태복음 5:23~24) 이웃끼리의 나눔과 화목이 먼저요, 하나님께 대한 제사나 제물은 그 다음이라는 뜻이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교회에 감사헌금을 듬뿍 바친다고 감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면서 정작 도움을 준 이웃에게는 전혀 감사의 뜻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감사의 고르반’이 되는 셈이다.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감사는 고르반의 속임수요, 교활한 자기기만(自己欺瞞)일 뿐이다. 누군가 이웃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면, 마땅히 그 이웃에게 진실한 감사의 뜻을 밝히 드러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기도가 ‘보이는 이웃’을 향한 감사의 응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것이 초막절의 화목제에 담긴 뜻이요, 영(靈)의 기도를 육(肉)의 삶으로 구체화, 일상화하는 ‘감사의 성육신(成肉身)’이라 믿기에.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