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 독립운동 기본사료조차 확인 안하나?”

최해규(1882~1958) 선생 아들 최만식(87)씨가 10월 15일 경기도 일산 자신의 집에서 부친의 사진을 들고 있다. 부친의 사진은 만주 시절(1920~1946) 찍은 것으로 두 부자는 닮은 데가 많아 보였다. <사진 이상기 기자>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 사는 최만식(87)씨는 4반세기 동안 부친 최해규(1882~1958) 선생의 독립유공자 공적재심사 요청에 나서고 있다. 환갑 두해 지난 1999년부터 보훈처 공훈심사과를 직접 방문하거나, 우편으로 ‘최해규 선생의 독립유공자 공적(재)심사 요청’ 민원을 제기했다. 아들 최씨는 “그동안 수차례 민원을 냈지만, 똑 부러진 답은 없고 이전에 보낸 것에 단어 몇 개 바꿔 보내기 일쑤였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과연 독립유공자 발굴과 선양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시아엔>은 지난 10월 15일 오후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최만식씨를 만났다. 인터뷰는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아들 최씨가 국가보훈처(2023년 6월부로 국가보훈부로 승격)에 제출한 민원에 대한 구체적인 보충 질의와 여기에 담기지 않은 가족사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부친 최해규 선생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신청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공적을 간단히 설명해 주시죠.
“1882년생인 부친은 3.1운동이 나던 1919년 4월 경남 울산군 언양(현 울주군 언양읍)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4월 2일 언양 장날을 기해 대대적으로 열린 만세운동에 주동자급으로 참여해 동생 최해식, 해선과 함께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부친은 곧이어 5월 다시 거사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만주 안동지방으로 26년간 피신해 있다 해방 후 귀국했습니다. 부친이 언양 지역 만세운동에 가담한 것은 <울산의 독립운동사>(2008년) <울산유사>(1979년) 등에 나와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울산의 독립운동사>에 보면 부친 최해규는 청년시절부터 천도교에 관심이 많아 1905년경 천도교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이어 1910년 봄 서울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을 수행하고 온 임명수 전도사로부터 전도와 자문을 받아 1910년 9월 천도교 언양군교구를 설립했습니다. 앞의 <울산의 독립운동사> 기록에 따르면 고종의 인산(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한 김교경 울산교구장(당시 49세)이 탑골공원의 3.1만세운동을 직접 지켜보고 울산교구 교인들에게 신문기사를 편지와 함께 보내면서 거사 준비를 당부한 걸로 나옵니다. 김교경 교구장이 내려온 후 초대 교구장인 부친 최해규를 비롯해 곽하진, 이규천, 유철순, 이무종, 이규로, 이규장 등 7명이 비밀리에 거사 준비에 들어갑니다. 당시 천도교 외에 유림측에선 이규인이 가세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당시 언양 장날인 4월 2일을 행동개시일로 잡고 이무종의 사랑방을 본부로 삼아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 42개를 한지에 그려 대나무를 사용해 손잡이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면 4월 2일 당일 언양 장날에 실제로 만세운동이 벌어졌는지요?
“이른 아침부터 이무종, 이규인, 이성영, 최해선, 이규경 등이 주동이 돼 장꾼들이 대거 모여든 11시 20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이날 26명이 검거돼 1년 6월에서 6개월의 감옥형과 태형, 집행유예 등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친은 또 다른 주동인물인 김교경, 이규장, 이규인, 이규로, 이규천, 강경찬, 곽해진, 유철순, 황선운 등과 함께 몸을 피해 검거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2008년 건국포장을 받은 이규인 선생을 제외하고 김교경, 최해규, 곽해진, 황선운 선생 등이 아무런 훈장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의 <울산의 독립운동사> 기록에 따르면 기미년(1919년) 언양 만세운동을 총지휘하고 선언서와 각종 신문을 보내어 만세운동을 이끌어낸 사람으로 천도교 교구장 김교경, 울산교구 설립한 초대교구장 최해규, 3대 교구장 곽해진이 사실상 거사 지휘자라고 나와 있더군요.
“저도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지 검거돼 형고를 겪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서 말했듯이 최해규 선생은 1919년 4월 2일 언양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일경의 체포를 피해 있다가 그해 5월 다시 거사를 준비하다가 발각됐다. 그리고 언양면 송대리 404번지 집과 가산을 모두 정리해 동생(해식, 해선) 가족 등 일가가 모두 만주의 안동지방 탄산성 오룡배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복 후 1946년까지 머물다 26년만에 고향 땅으로 귀환했다. 4반세기 넘어 귀국한 한반도는 남북이 허리가 잘린 채 두 동강 나 있었다. 

언양의 대농이었던 최해규는 만주 시절 셋방을 전전하다 60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 고향 땅에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10년 남짓 고향에서 후학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며 연명하다 1958년 눈을 감았다. 

아들 최만식씨는 “보훈 당국은 아버님의 만주 행적이 해명돼야 재심사가 가능하다고 한다”며 “사회주의 시절 중국이라면 모를까 한중 수교가 30년이 넘었는데, 이런 자료 요청 하나 중국 정부에 못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과연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발굴할 의지가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고 했다.

최씨는 “보훈 당국은 아버님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일부 지방에서 파견한 일본 사죄단 명단에 들어 있다며 아버님과 우리 가족을 모욕하기까지 했다”고 했다. <아시아엔>은 보훈 당국의 무관심과 무신경, 무능력을 앞으로 몇차례 더 파헤치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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