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 8장
교육을 뜻하는 Education에는 두 어원이 있습니다. 라틴어 educāre와 ēdūcere입니다. educāre는 안에다 집어넣는 것을 의미하고 ēdūcere는 안으로부터 끄집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교육이란 지식을 입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의 잠재력을 표출시키는 것까지라 할 수 있습니다.
정답을 주입하면 그저 정답이 주입되는 것으로 그치지만, 질문을 주입하면 내면의 많은 것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옵니다. 유대인 부모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보다 ‘아이가 무슨 질문을 가지고 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학교 다녀온 아이에게 “오늘 선생님께서 뭘 가르쳐 주시던?“이 아니라 “오늘 선생님께 뭘 물어봤어?“라고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정답보다 질문이 더 강력합니다. 정답이 주어지면 정답만 보이지만 질문은 정답 주변부까지 보게 합니다. 답이 놓여 있는 맥락까지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질문이 가진 위력입니다.
성경은 진리인데, 진리란 거대하고 경이로운 신비(mystery)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에게 답이 되기도 하지만 질문으로 남아 있을 때가 훨씬 많습니다. 거대한 신비 속에서 인간의 머리로 가까스로 이해한 영역만을 우리는 ‘답’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소용돌이치는 질문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함이 없고 무한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향해 우리의 존재 전체가 활짝 열리는 경험, 그것은 질문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심각한 질문들로 인간 존재를 뒤흔들어 놓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또한 하나님은 욥에게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무지막지하게 던지셨습니다(욥 38장 이후).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을 인용하여 답한다면 예수님은 다시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 대답을 하기 직전에 제자들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여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예수님이 직접 몇 마디 가르쳐 주시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어보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정답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 답을 말하는 ‘나’에게 있다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