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송해 2주기…KBS ‘송해 뮤지컬’ 리뷰로 되돌아보는 국민MC

<동아일보> 편집국장 때 나는 이야기의 보고(寶庫)인 송해 선생 회고록을 연재할 욕심으로 공도 많이 들였다. 그러나 실패했다. 1988년 오토바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아들을 가슴에 묻은 통한(痛恨)의 기억 때문이다. 몇 차례 나의 집요한 설득 끝에 절반승낙을 받아내 담당기자까지 지정해 사전작업 차 두어 번 만나게 했다. 그러나 송 선생은 나를 불러 소주 마시는 자리에서 “도저히 못 하겠다”며 다시 고개를 가로 저어버렸다. “회고록을 하면 그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을 텐데, 지금도 아들 생각 때문에 한남대교를 못 건너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송 선생의 눈을 바라보니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래서 나도 ‘송해 회고록’을 포기했다.

그런데 선생 별세 몇개월 전 KBS가 ‘송해 특집 뮤지컬’을 방송했다. 여기에 보면 송해 선생은 6·25 때 월남해 국제시장에서 두부를 팔다 친구의 권유로 악극단에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악극단에서 선전벽보를 붙이는 잡일을 하다 사회자로 무대에 서고 배필을 만나기까지, 그의 인생 역정들. 그의 어린 시절과 10대 후반~20대 중반, 20대 후반~30대 중반까지를 가수 신유는 청년 송해가 배필을 만나서 결혼에 골인해 가정을 꾸릴 때까지의 역을 맡아 연기와 노래를 했다.

뮤지컬 팀이 6·25때 송해와 어머니의 이별 장면을 포탄도 터지고 연기도 피어오르는 무대로 실감나게 꾸몄다. 그의 본명은 송복희, 그는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향하는 해군 상륙함에 몸을 싣고 홀홀단신 부산으로 왔다. 해군함에서 망망대해 저편의 수평선을 보면서 바다 해(海) 자를 넣은 이름 송해를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그가 한번씩 던지는 “우리나라에 바다가 몇 개 있지요?”라는 우스개가 있다. 아재 개그의 답은 4개. ‘동해 서해 남해에 송해까지 네 개’라는 말이다. 그는 남행 후 육군통신학교를 수료하고 통신병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한 많은 피난살이 고생문이 열렸다. 어머니와 이별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 구성지게 흘러나온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트롯 사상 불후의 명곡 반열에 오를 만큼 국민들이 즐겨 불렀던 바로 그 노래다.

대학생이나 더 어렸을 때 친구들과 카바이트 막걸리 한잔 걸치고 이 노래를 불러제낀 추억들이 있을 거다. ‘어머님의 손을~놓~고/ 돌아~설 때~에~/ 부 어~엉새도 울어~었다오~/나도 우~러~었~소/ 가랑이~잎이 휘나~ㄹ~리는/ 산마~아~루 턱~을/ 넘어~오~~던 고모~려~엉이…’

송 선생은 어머니와 어쩔 수 없이 헤어져 홀로 남으로 넘어온 불효를 자책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꿈에서도 한번도 뵙지 못한 어머님, 불효자식이 뭐가 보고 싶어서 나타나시겠습니까? 이 자식의 불효를 용서…” 송 선생은 고모령 2절을 부르다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는 고모~령~을/ 언제나…’ 이 대목에서 노래를 끊고 “어머님 정말 보고 싶습니다! 불효자를 용서하세요”라고 절규한 뒤…다시 “넘~느~냐…”를 이어 부르면서 노래를 눈물로 마무리했다. 객석에서도 손수건을 꺼낸 사람들이 많았다.

35년간 송 선생이 진행한 전국노래자랑 입상자들이 객석에서 눈물과 박수로 그와 함께 애환(哀歡)을 나눴다. 송 선생의 노래 솜씨는 가수 뺨친다. 구수하게 불러제끼는 그의 노랫가락을 들으면 주흥(酒興)이 도도해진다. 몇 년 전 김동건이 20년 넘게 진행하는 ‘가요무대’에서 송해 선생이 ‘고향설’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본 일이 있다.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백년설이 불렀고, 1942년 오케이레코드가 앨범을 냈다. 김다인 작사 이봉룡 작곡이다. ‘한송~이~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우~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끝~없이 쏟~아지는/ 모~란 눈~속에/고향을 불러~보니/ 고~향을 외여~보니/ 가슴~ 아프~다’ 두고 온 북녘의 고향을 그리는 이 애절한 옛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는 걸 보고 나도 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송 선생의 음반 10개 중 하나인 ‘내 고향 갈 때까지’라는 제목의 음반에 담긴 애절하고 뭉클한 실향의 노래들.

고인은 몇 년 전의 ‘아흔즈음에’ 연작 음반(버전 1~6)과 ‘내 인생 딩동댕’ ‘유랑극단’ 등을  낸 ‘찐 가수’다. “아버지가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일요일 점심 때마다 ‘전국노래자랑’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너무도 많이 봤다. “어머니는 전국노래자랑에 맞춰 점심을 준비했고, 어김없이 우리 가족은 식탁에 모여 송 선생을 보며 밥을 먹었다.”

​전국노래자랑은 1980년부터 시작했으니 별세하던 2022년까지 42년째. 송 선생은 1988년부터 34년간 진행을 맡았다.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선 출연자만 3만명이 넘었고, 무대를 지켜본 관객은 1000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송 선생은 “자리에 앉은 관객만 그렇고, 나무나 담 위에 혹은 서서 본 관객까지 합치면 더 많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월남 후 국제시장 두부장사를 비롯해 선생은 먹고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며 실향민으로 살았다. 실향민 친구의 소개로 들어간 창공악극단에서 벽보 붙이기 등 잡역부로 일하다 악극장을 졸라 사회자로 데뷔한다. 태진아가 어제 KBS 프로그램에서 악극장으로 열연을 했다. 노래는 영 별로였다. 독감 때문인지, 컨디션이 난조인지 노래는 고성 영역에서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 나오는 등 듣기 민망했다.

송 선생의 사실상 은퇴무대로 여겨 컨디션 난조에도 의리의 태진아가 ‘무리하게 출연했나?’ 생각도 들었다. 단짝인 송대관에게 송해를 위해 전화를 걸어 부탁하는 장면을 구수하게 연기했다. 태진아는 본업인 노래는 별로였고 가욋일인 연기가 압권이었다.

영탁이 악극장 태진아를 졸라 마침내 악극단 사회자로 첫 데뷔한 송해 연기를 했다. 그때 김연자가 나와서 ‘아모르 파티’를 열창했다. 객석에서도 많은 남녀 입상자들이 일어나 춤을 추며 열광했다. ‘결혼은 선택/ 연애는 필수…’라는 통속적인 가사가 이 노래를 대(大)히트시켰다. ‘자신에게 실망하지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라는 피부에 닿는 가사도…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운명관(運命觀)의 에스프리를 담은 글귀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 인간이 지켜야 할 삶의 자세를 웅변한 니체 식 표현, 바로 운명애(運命愛)이다. 젊은 사회자 송해(영탁)는 “신나고 경쾌하게 노래한 최고의 무대였다”고 트롯 여왕 김연자를 한껏 치켜세웠다. 송 선생의 딴따라 인생을 담은 영화 ‘송해 1927’이 개봉됐다. 동명의 책 <송해 1927>도 나왔다. 책은 선생을 인터뷰한 내용을 모았다.

윤재호 감독과 이기남 PD가 송 선생을 비롯해 그의 지인들과 나눈 인터뷰를 해 책으로 알알이 엮어냈다. 희극인 방일수, 엄영수, 김학래, 전국노래자랑의 신재동 악단장, 선생의 둘째 딸과 손자 인터뷰를 담았다. ​그의 나이는 혁명가 체 게바라보다는 1살,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보다는 2살, 마틴 루터 킹 목사보다 2살, 엘비스 프레슬리보다는 8살 위로 모두의 형이거나 오빠다. 2020년 8월 18일, 인터뷰에서 그가 단역에서 조연으로, 조연에서 주연으로 올랐을 때의 심경 고백은 절절하다.

“이 직업을 천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같은 무대에 100번 서면 100번 다 긴장하게 됩니다. 관객이 단 한 명 있어도 만 명이 있다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매번 관객은 다르거든요.”

<송해 1927>

악극단 때 첫 사회자로 무대에 선 이후 60년 가깝게 연기자 희극인 가수로 살아온 그의 철학이 배어 있다. 송 선생은 오랜 세월을 강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분투한, 아니 즐기며 연기한 ‘살아 있는 전설’인 셈이다. ​6·25 전쟁 때 송 선생은 24살, <1927 송해> 책은 북한 해주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남한에서 북한 해주음악전문학교에서 쌓은 경험과 친구 소개로 운명처럼 창공악극단에 입단하게 된다. ‘딴따라 인생’의 첫 걸음을 뗀 거다. 그는 희극인이자 방송인으로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한 사람이다. 창공악극단과 함께 전국을 유랑하다 <동아방송> ‘스무고개 사전’ MC에 참여하게 되면서 방송을 시작했다. 그 뒤로 <TBC>에서 ‘가로수를 누비며’ 교통방송 진행자로 있을 때부터 인기를 모으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극이 찾아왔다. 내가 그의 회고록을 포기하게 만든 ‘아들의 오토바이 사고’ 말이다. 가슴에 아들을 묻는 악상(惡喪)으로 충격에 빠졌던 송해 선생에게 또 다시 운명처럼 전국노래자랑이 왔다.  대중을 웃기고, 울리기도 하는 광대로 전국 곳곳을 유랑하는 딴따라 인생이 1988년 5월 다시 시작된 거다.

그때 이 방송을 40년 가깝게 진행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최고령 TV음악 탤런트 쇼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 부문이다.
송 선생이 꼭 100수를 넘기고 전국노래자랑 MC도 고종명(考終命)하실 때까지 계속하길 바랬는데, 그만 2022년 6월 8일 하늘의 별이 되셨다.  평생 방송일로 바쁘게 사느라 가수 지망생 아들 재능도 살피지 못해 통한의 눈물로 자책한 송해 선생이다.
딸이 아버지 몰래 간직한 보물이 공개되면서, 책을 통해 선생과 고인이 된 아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들을 추억하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와 벅차오른 감정을 거기에서 고스란히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다.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았을 때 50대, 지금까지 ‘일요일의 남자’로 최장수 MC로 그는 우리 곁에 있다. 필생의 소원이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보는 거라는 말을 늘상 입에 달고 살았다. 10여 년 전 북한의 수도 평양 대극장 무대에서 노래자랑 사회를 본 일이 있다. 그 후 죽기 전, 고향 땅에서 꼭 한번 노래자랑 사회를 보고 싶어 했다.

송해 시비와 송해길

​종로3가 초입에서 그가 마련한 ‘원로연예인 사랑방’이 있는 건물 부근까지 낙원동 길은 ‘송해로’다. 그 길 중간쯤에 ‘송해의 딴따라’라는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있다.

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풍악 따라 걸어온 유랑의 길
바람 속에 청춘이 간다
인생이 이거라고 이거라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나
아! 오늘은 어디에서
임자 없는 내 노래를 불러보나
가진 건 없어도 행복한 인생
나는 나는 나는 딴따라
‘송해의 딴따라’ 중에서

대구 달성군은 ‘송해 코미디 박물관’을 건립했다. 기억을 하실 거다. 2016년 연말 느닷없이 ‘송해 사망설’이 돌았다. 그때 아흔을 갓 넘긴 원로 연예인의 ‘영면’ 소식은 새빨간 거짓뉴스였다. 몇 달 뒤 한 방송에서 “전엔 그런 소문이 돌면 ‘너 참 오래 살겠다’ 했는데 막상 고민이 되더라”고 했다.

그는 너그럽게 거짓뉴스 발신자에 대한 고소를 취하해줬다. 그리고 희극인답게 재치 있게 멘트를 날렸다. “오래 살라고 그렇게 한 거 아니냐? 전문의들은 내 수명이 120세라 했는데, 괴문자 돌고 나서 30년을 더 줬다”라고 했다.

KBS 무대는 가수 박서진과 송소희가 나오면서 마지막을 향해 달렸다. 박서진은 드럼과 북을 치면서 ‘초혼’을 땀이 비 오듯 열정적으로 불렀다. 송소희는 요염한 표정으로 제주 민요인 오돌또기를 간드러지게 불렀다. 이어 전국노래자랑 과거 입상자들 중 가수로 데뷔했거나 방송을 타 인기인이 된 사람들의 영상편지가 소개됐다. 이 중 미스터 트롯, 미스 트롯에 나온 바 있는 12살의 홍잠언과 김태연은 ‘항구의 남아’ ‘새타령’을 멋지게 소화했다.

손담비의 노래와 춤으로 유명해져 광고모델까지 한 8학년 어르신까지, 송해 선생에겐 ‘젊은 친구’였다. 유랑극단에서 광대로, 사회자 격인 변사로, 방송인으로 관객들과 웃고 울던 50여 년 송해의 딴따라 인생! 누구보다 눈물과 고독으로 점철된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도 끝내 이겨내고 팬들에게 웃음을 전하려 노력한 선생.

인생 사다리를 한 계단 씩 분투(奮鬪) 끝에 올라온 그의 말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누가 직업에 대해 불평을 하면 한마디 합니다. 세상만사에는 우선 장단(長短)이 있는 거고, 가볍고 무거운 경중이 있는 거고, 높고 낮은 높낮이가 있는 건데, 왜 나라고 왜 높은 곳이 없겠습니까? 다 있습니다. 다만 올 때가 아직은 되지 않은 거죠.”

100살 넘게 전국노래자랑 MC를 송해 선생이 계속하시기를 진심으로 빌었는데…송해 선생은 자신의 후계 차기 MC로 이상벽을 지목한 적이 있다. 그때 덧붙인 말이 걸작이다. “그런데 50년 뒤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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