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출구 없는 로힝야 난민촌 ‘콕스바자’

폭우 속 로힝야 난민촌 콕스바자에서 짐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선 아이들 <사진=세이브더칠드런>

[아시아엔=오준 세이브더칠드런 이사장, 전 유엔대사] 지난 8월 콕스바자의 로힝야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들은 모두 둥글고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 만난 아이들과도 다르게, 어른과 눈 마주치는 걸 피하려는 기색이 없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쳐다본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실제 그럴 지도 모른다. 필자가 만난 7살의 하미다(가명)는 콕스바자 난민촌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살며 아직 한 번도 바깥 세계를 본 적이 없다. 난민촌에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TV, 핸드폰, 전등, 냉장고도 없으므로, 사람이 사진에 찍히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를 것이다.

콕스바자(Cox’s Bazar)는 원래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을 때 벵갈만의 어촌이었는데, 18세기 총독이던 하이럼 콕스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1947년 독립한 파키스탄에 속했다가 1972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자 그 일부가 되었다.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하여 (세계에서 가장 긴 비치라고도 불림) 방글라데시 국민들의 최애 신혼여행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콕스바자와 이웃한 미얀마로부터 로힝야족 난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소규모였는데, 2017년 미얀마 내의 로힝야 대학살 사건을 계기로 수십만명이 들어와 현재에는 1백만명 규모의 대규모 난민촌이 형성되어 있다.

로힝야 난민 사태는 역사적 배경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인도와 버마(미얀마)가 모두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영국은 방글라데시 지역의 이슬람 소수민족을 버마로 이주시켜 이들을 활용하여 식민통치를 했다. 1948년 독립한 버마는 로힝야족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해서, 특히 미얀마로 국명을 바꾼 후 군사정부는 로힝야의 국적을 박탈하는 등 탄압을 강화했다. 심지어 미얀마의 민주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도 “미얀마 사회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 없이 로힝야 탄압을 비판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필자가 직접 들은 적도 있다.

이처럼 미얀마인들에게 로힝야족이 오랫동안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은 난민사태의 해결을 매우 어렵게 한다. 물론 역사적인 증오심이 폭력과 탄압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미얀마 군과 민간인들의 로힝야 탄압은 국적 박탈 이외에도 집단학살, 성폭력 등 수많은 범죄행위가 국제기구에 의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약 140만의 미얀마 내 로힝야족 중 70% 이상이 콕스바자로 탈출한 현실에서 이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데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난민 문제는 전쟁, 재난 등 난민 발생의 원인이 해소되면 원상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얀마 측이 본국 귀환을 수용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로힝야 난민 사태는 다르다. 그렇다고 방글라데시에 영주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의 1.5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면적에 우리의 3배가 넘는 1억6천만의 인구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다. 로힝야족이 인종적, 종교적으로 방글라데시 국민과 유사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영구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에 따라, 난민촌 내에 일체의 내구성이 있는 건물이나 도로를 허용하지 않고 (대나무와 짚으로 된 건물만 가능) 전기나 통신시설도 불허하는 것이다.

로힝야 난민촌 콕스바자를 방문한 필자(왼쪽) <사진=세이브더칠드런>

이런 상황에서 유엔이나 국제 NGO 등 130여개 인도적 지원기관이 로힝야 난민의 인도적 위기에 대처해주고 있다. 이들은 콕스바자 내 33개 난민 캠프에서 식량, 교육, 보건의료 등의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연간 총 1조원 규모의 지원이 필요한데, 실제로는 6,500억 정도가 제공되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도 연간 약 150억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1백만 로힝야 난민 중 절반인 50만명 정도가 18세 이하 아동이다. 난민들은 성인 남자보다는 여성과 아동이 많은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콕스바자는 특히 심하다. 아동들에게는 정식 교육이 허용되지 않고, 난민들 중에 교사 역할이 가능한 사람 중심으로 교육이 제공된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청소년기의 아동은 교육도 취업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탈과 범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과 함께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 난민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은 없다. 아무리 가난하고 생활이 힘들어도 견딜 수만 있다면 자기가 살던 곳에서 버티려고 한다. 그대로 있으면 삶이 유지될지가 확실치 않은 절박한 상황에서나 피난을 간다. 따라서 난민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그처럼 절박한 상황이 생기는 것을 막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난민이 된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빨리 종식할 수 있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여기에 로힝야 난민 문제의 딜레마가 있다. 모든 것이 임시적이어야 하는 난민 사태에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난민 문제와 무관한 국가가 아니다. 중동지역 난민이 망명을 신청하기도 하고, 정부가 인도적 체류를 허가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오늘날 난민 문제에 무관한 국가는 없다. 세계 최대의 무국적자 집단이 된 로힝야 난민이 살고 있는 콕스바자는 우리나라에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아시아 내에 있다. 우리는 지구촌 가족으로서, 선진 공여국으로서, 또한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로힝야 난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힝야 난민촌 콕스바자 내 교육센터의 아이들 <사진=세이브더칠드런>

필자가 교육센터(‘학교’라는 명칭이 허용되지 않음)에 들어가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목이 터지라고 동요를 부르며 율동도 열심히 했다. 신기하게도, 비록 난민촌 밖의 세상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지만, 어느 나라 아동들보다 더 밝고 신나는 표정이다. 하미다의 차례가 오자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유명한 영어 동요인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을 불렀다. 통역을 통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으니, 아무도 못 들어 봤다고 한다. 나는 한국에서 온 60대의 이방인도 같은 영어 노래를 배운 적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Are you sleeping’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너무 신기해서 배꼽을 잡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들이 10여년 후 성인이 되었을 때도 오늘의 만남이 콕스바자 생활 중에 재미있던 기억으로 남길 바라면서, 비가 오는 난민촌의 진흙탕 거리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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