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여백과 틈에서 빚어진 감동
<성경>을 백번 읽은 사람과 한번만 읽은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백번 읽은 사람은 불자들과도 평화롭게 지낸다. 그러나 한번만 읽은 사람은 불자들을 쉽게 적대시한다. <반야심경>을 한번만 읽은 사람과 백번 읽은 사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백번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과도 잘 지내지만, 한번만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을 적대시한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을 한권 혹은 한번만 읽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과감하다. 책을 한권만 읽은 사람은 헛똑똑이가 되어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
생각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고 가엾다. 중국의 홍위병들을 생각해보라. 한쪽을 선택하여 거기에 자신을 맡긴 자들은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진영에 빠진 자들이다. 진영에서 시킨 대로만 할 줄 알지 자신의 독립적 사유 능력은 거세된다.
대립면의 상호의존을 의식하는 자들은 숙고하는 버릇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악의 근원은 무지하여 사유하지 않는다.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표현되는 대립면의 공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쪽을 선택한다. 물론 누구나 결국에는 선택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그 선택이 깊은 사유에서 나왔으냐, 아니면 아무런 사유없이 나왔느냐에 따라 그 성숙도와 설득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진영에 갇혀 별 생각 없이 한쪽을 선택하여 고착시킨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지 의식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양심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대립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진영 논리에 빠져서 그 진영의 논리를 상대방에게도 쉽게 강요하는 일이 적어진다.
대립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원칙을 적용하여 유무상생을 보면, ‘유有’가 ‘유有’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무無’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유’의 존재적 테두리가 매우 느슨하거나 흐리거나 그 자체에 틈이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물론 ‘무’도 마찬가지다. 느슨하거나 흐리거나 그 자체에 틈이 있어야 대립면을 받아들이고 허용하여 상호의존할 수 있게 된다.
진영에 갇힌 자들은 협치를 할 수 없다. 포용력을 갖는 것도 불가능하다. 협치나 포용은, 협치나 포용을 하는 주체에 틈이 나있고 여백이 있어야 가능하다. 틈이나 여백이 없다면, 다른 대립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틈이 없는데 어떻게 대립면이 뚫고 들어올 수 있겠는가?
여기서 틈은 존재의 균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면을 받아들일 가능성으로서의 여백 정도다. 진영에 갇혀 상대방에게 쉽게 프레임을 씌울 경우엔 어떤 여백도 존재하지 못한다. 틈이 없어진다.
틈과 여백이 없으면 거기서 어떤 감동도 생기지 못한다. 감동이 없으면 논리로 무장한 살벌한 비난만 남는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이다. 조선시대 당쟁이나, 진영에 빠져 서로 비난만 일삼는 지금의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처럼 개념을 바르게 정하여 사용하자는 말은 어떤 개념도 여백과 틈을 주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다.
(도덕경의)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은 개념을 여백이나 틈 없이 사용해서 세계의 진실을 담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는 서로 여백을 나누며 틈을 허용하는 것 아닐까? 바로 유무상생有無相生인 거다.
필자는 보통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인은 언어를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언어를 재배치하고, 위치를 다르게 하며, 개념과 개념 사이에 틈과 여백을 남긴다. 그 틈과 여백 사이에 소리를 심는다. 언어들 사이의 남겨진 틈과 여백들이 소리를 입은 개념들에 탄력을 주어 드러나지 않거나 아직 없는 진실들을 튀어 오르게 한다.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생산되는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재배치하고 부리면서 거기에 틈을 만들고 그 틈 사이에 소리를 입혀서 탄력있는 감동을 만들어낸다. 협치나 포용이나 하는 것들은 배척이나 편 가르기에 비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또 얼마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지? 다 여백과 틈에서 빚어진 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