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징비록’, 짧은 인생 값지게 하는 지혜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우리나라에는 <징비록> 같은 기록이 많지 않다. 물론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처럼 위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 이것들을 제외하면 기록물이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징비록>은 기록 문화가 돋보이지 않는 우리나라에 남겨진 빛나는 기록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책을 잘 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징비록>이 처음 출간된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다. 1659년 일본 교토에서 <조선징비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00년 후에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들들에게 이 책을 자세히 읽으라고 권한다. 다산 선생이 읽으라고 강조하기 전까지 조선 사람들은 <징비록>을 읽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역사나 문제를 보는 철저함이 일본 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 전란을 겪고 그 큰 치욕을 당하며 만든 <징비록>을 후대는 읽지 않은 것이다. 단순히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문제에 철저하게 집중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왜 임진왜란을 당했는지, 이런 기록물을 우리는 왜 읽지 않았는지 반성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해야겠다. .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징비록>에서 뽑아 봤다. 우리가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 세 사람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서 봐야 한다. 선조, 유성룡, 그리고 이순신. 이 세 사람을 놓고 지금의 선조는 누구인지, 지금의 유성룡은 누구인지, 지금의 이순신은 누구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선조인지 유성룡인지 혹은 이순신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필자가 뽑은 문장은 성웅 이순신을 이해하고 읽으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은 원균의 계략으로 감옥에 갇히고 그 소식을 들은 노모는 근심에 싸여 돌아가셨다. 이후 감옥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상복을 입고 권율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한다. 그러다가 셋째 아들이 전쟁 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때 이순신은 통곡한다.

그는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는데 나라는 이순신을 어떻게 대했나? 이건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그것을 감당해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 중간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만 이순신은 감당해냈다. 이것은 초인적인 인격의 힘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책을 보면 이순신이 오랜 시간 함양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조심스러워서 마치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내면에 담력을 가지고 있어 자기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이는 바로 평소에 그가 자신을 함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자기가 함양한 정도 이상을 살기 어렵다. 이순신처럼 되고 싶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내면을 함양해야 한다. 이순신처럼 지식을 쌓고, 인격을 길러야 한다. 스스로 함양하지 않으면 이순신 같은 인격을 갖추기 어렵다.

우리는 <돈키호테>부터 <이솝 우화>까지 자기를 함양하는 것에 관해 읽었다. 그 다음에는 <아Q정전>을 통해 자기를 함양하지 않으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징비록>에서 아Q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가 망하고 재난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의 여덟 편과 <아Q정전>, <징비록>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바로 자기를 함양하라’이다.

어떤 분들은 굳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하냐고 묻지만, 생각하지 않으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자기로도 살아보고 자기가 아니게도 살아보고, 자유롭게도 살아보고 종속적으로도 살아볼 정도로 인생이 길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에 내가 나로 사는 이 일만이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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