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에레브 교황청 대사 고별미사…은혜와 인간미 넘치다

주한 교황청 대사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

몰타 출신 대주교 5년 봉직…”한국 떠나 슬퍼지만 어머니 가까운 곳에서 보게돼 기뻐”

5년 세월이 쏜살처럼 흘렀다. “한국 교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러 왔습니다.” 주한 교황대사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의 2018년 5월 27일 한국 도착 일성이었다. 주한 교황대사관저는 옛 청와대 가는 길목, 자하문로에 있다.

주일인 18일 주한 교황대사가 집전한 고별미사가 열렸다. 이승훈 순교자의 피붙이 신혜선 회장 모녀를 따라 나도 갔다.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는 한국에 있을 때 주일 미사 집전을 거르는 법이 거의 없었다. 바오로-베로니카, 이름을 받은 두 아이의 세례식까지 이날 대주교가 몸소 집전했다.

마지막 주일미사는 경건하게 진행됐다. 소프라노 박성희 성악가가 구노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감동적으로 불렀다. 두곡의 아베마리아가 울려 퍼지는 동안 수에레브 대주교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외조부가 명창 임방울 선생인 박성희의 목소리는 귀를 뚫고 마음을 울렸다.

다정다감한 슈에레브 대주교는 어린이들만 보면 자애로움이 얼굴에 넘친다. 세례식을 마치며 생후 50일 난 베로니카와 바오로를 번쩍 치켜들어 축하했다. 박성희는 교황대사를 보내는 아쉬움에 마음이 북받친 듯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탈리아 공연을 가있느라, 이임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어서 더욱 그랬으리라.

수에레브 대주교는 재임 중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 성사를 위해 애를 많이 썼다. “한국 교회가 마음을 모아 기도해달라”고 성직자와 신도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슈에레브 대주교는 “교황 방북을 위해 중요한 것은 기도”라고 말하곤 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설득하는 힘을 주셨다”며, 그렇게 말씀했다. 한국 교회가 통일에 대비, 선교 사제를 양성하는 역할도 해줄 것을 요청했다. “부임해 5년 간, 살아있고 생동감 넘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봐 기뻤다”고 회고한다. 꽃동네 방문 때,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복음 실천에 힘쓰는 걸 보고 흐뭇해 했다.

슈에레브 대주교는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쇄신을 위해 “늘 복음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관저에서의 주일 미사에는 늘 한국 신자들이 왔다. 고별미사라서, 평소보다 많은 100여명이 몰렸다.

대주교는 아리랑을 아름다운 노래라며 즐겨들었다. 어린이들과 함께 아리랑을 합창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미사 때 한국말로 주님의 기도를 함께 하는 모습은 정겹다. 미사 중 낭독한 마태오 복음 중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주님의 말씀…”이라는 귀절이 마음에 남는다.

한홍순 전 교황청대사가 대표로 고별사를 했다. 그는 경기고 서울상대를 마치고 로마에서 경제학 박사를 땄다. “시간 절약을 위해 써왔는데, 나도 몰래 이탈리아어로…” ‘떠나는 대주교를 위해 이탈리아어로 마음을 쓰지 않았을까?’

“먼저 교황님께 이렇게 훌륭한 외교관이자 훌륭하고 어진 목자를 보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대주교가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을 강조했다”는 소개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는 마음’을 강조한 것과도 통한다”고 한 것과 일치하는 말이다.

만나면 헤어지고 ‘회자정리’, 떠나면 다시 만난다는 ‘거자필반’을 고별사 끝부분에서 언급했다. 한 전 대사는 이 말로 고별사를 마쳤다. “어디로 가시든 기도의 품안에서 대사님과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샌드위치와 떡, 쿠키 등 다과를 들고 교황대사와 기념촬영을 하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5년 전, 교황대사 임명 때 대주교로 서품됐다.
당시 “외교관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기쁘게 교황대사직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주님께서 한국으로 이끌어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 싶어…”라 했다.

교황대사직을 짐이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으로 여기며 즐겁게 왔다. 나흘 전, 한국 바티칸 외교 수립 60주년을 기념한 ‘찬미받으소서(Laudato Si)’가 대주교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다.

14~22일 명동 갤러리 1898에서 주한 교황청대사관 경당의 청동 십자가, 교황 바오로 6세의 칙서 원본 등 소장품과 미술가회 회원들의 작품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947년 패트릭 번 주교가 초대 교황사절로 왔다. 1963년 바티칸시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는다. 패트릭 번 주교의 교황대사 임명은 최초로 외교사절이 파견된 역사적 사건이다. 교황청 지원에 힘입어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정식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어서였다.

필자가 수에레브 대주교에게 떠나는 심경을 물어봤다. “감정이 복잡하다(Mixed feelings). 먼저 슬픔(Sad)이 앞서고, 새로운 미션에 대한 기대도 있다. 무엇보다 고국의 어머님 가까이에 가게 되는 건 기쁜 일이다.”

수에레브 대주교는 따듯한 심성의 인간미가 돋보이는 분이다. 그의 친근하고 자애로우며 다양한 표정들에 누구나 매료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를 수석비서로 보임했을 만큼 아꼈다. 2013년 신입 성직자들 면담에서, 교황이 수에레브를 칭찬했다.

출퇴근 때 늘 자전거를 타는 검소함에 탄복을 금치 못해서였다. 수에레브 대주교님이 고국 몰타를 자주 찾아 모친 뵙고 효도하시길…

슈에레브 교황대사 약전

슈에레브는 몰타에서 가톨릭 신학 및 철학을 수학했다. 1984년에 사제로 서품됐다. 가톨릭 고등 수학기관(Pontifical Theological Faculty ‘Teresianum’)에서 신학 박사를 땄다.

그리스도인 삶의 부활 신비에 관한 박사 논문으로 영성 분야에 특히 정통하다는 평이다. 몰타로 돌아와 사목 활동을 하다, 1991년 교황청립 라테라노대 총장비서를 했다. 1995년부터 로마 교황청 국무원에서 일하며 2차례 캐나다 오타와에서 사목을 했다.

2000년부터 교황궁내원에서 근무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 2003년 9월 9일자로 몬시뇰 서임을 받는다. 2007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수석 비서관 아래 차석 개인 비서가 된다. 그때 교황의 순방 여행에 동행한다. 2013년 교황 프란치스코 선출 후 수석 개인 비서가 됐다.

슈에레브가 수석비서였으나, 실제로 개인 비서를 한 것은 차석 파비안 페다치오였단다. 2013년 11월 29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슈에레브를 로마 교황청 종교사업협회(IOR) 및 경제행정위의 교황 전권 대리로 임명한다. 교황에게 주요 업무를 보고하는 중책을 맡긴 거다. 2014년 3월 3일, 개혁의 일환으로 설립한 신설 교황청 재무원 사무총장으로 임명된다.

2018년 2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슈에레브 몬시뇰을 대주교로 서품, 대한민국 및 몽골 교황 대사로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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