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인식’이 ‘존재’를 규정하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엘리야와 대결할 때, 850명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엘리야 혼자만 보았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얕보았던 하나님을 엘리야는 크게 보았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진영 앞에 나타났을 때, 사울의 눈에는 골리앗이 거대해 보였지만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이 더 커보였습니다.”<그림 ‘광야의 엘리야’ 최영심 작>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엄마에게 유독 크게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자기 아이가 내는 소리입니다. 다른 소음과 섞여 있어도 엄마에게는 아이의 소리가 가장 또렷하게 들립니다. 아이의 목청이 좋아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3년 동안 지독한 가뭄이 지속되고 있을 때, 엘리야는 큰 빗소리를 듣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왕상 18:41)

문제는 함께 있었던 아합과 사환에게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빗소리는커녕 땅이 바싹 메말라가는 소리만 클 뿐이었습니다. 큰 빗소리가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엘리야에게만 크게 들린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엘리야와 대결할 때, 850명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엘리야 혼자만 보았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얕보았던 하나님을 엘리야는 크게 보았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진영 앞에 나타났을 때, 사울의 눈에는 골리앗이 거대해 보였지만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이 더 커보였습니다.

밤하늘에 예수님 탄생 소식을 알려주는 별이 나타났을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눈에는 별이 안보였지만 동방박사 눈에는 밝게 보였습니다.

무엇이 현실일까요? 무엇이 실상일까요? 귀 기울여 크게 듣고, 주목하여 크게 보는 것, 그것이 곧 나의 현실이 됩니다. 인식이 존재를 규정합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열 두 명이 가나안 땅을 똑같이 보고 와도 열 명의 이야기와 두 명의 이야기가 다르지 않았나요?

보고 듣는 것은 그 자체로 영적인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보고 들은 것을 근거로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의 결과물이 만든 구조물을 우리는 현실이라고 파악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구성원 각자의 믿음이 반영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제공받은 믿음으로 살고 있을까요? 언론이 제공한 믿음인지, 특정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제공한 믿음인지, 돈이 제공한 믿음인지, 아니면 창조주의 말씀에서 비롯된 믿음인지 질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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