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의 렌즈 판소리] ‘격물’···진실과 진리를 캐묻다
격물(格物)은 단순한 인식에 머무르는 공부 방식이 아니라 물리적인 속성을 완벽하게 알아내는 공부 방식이다. 격(格)이란 사물이나 일의 격식이고 성격이고 품격이며 조격이고 격조다. 단순하게 책을 통해서 격을 파악한 것은 수박겉핥기 식의 앎에 불과한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세울 때 얼마나 많은 논의와 증험(證驗)을 통해서 정립해 나가던가. 그러한 것이 진정한 물리학자이고 철학자다. 책을 통해 사유하고 얻은 사변적 논리는 얄팍한 수준의 지식에 불과하다.
자신의 철학적 명제를 개발하여 그것을 세상에 내놓아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증명 받아서 새로운 물리와 철학을 세워야 그것이 진정한 물리학자이고 철학자의 학문적 자세라고 본다. 자신의 새로운 물리와 철학을 연구하지 않고 오직 기존의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새롭게 해석하여 풀어먹는 것은 바람직한 학문적 자세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변적 논리만 펴내는 지식인들을 따르고 존경하며 지성사회를 형성해온 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세계를 선도하는 물리학자나 철학자들이 안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일상의 물리적인 사건들의 이치 속에 운동하는 물리법칙들이 우주정신에 부합하여 인류의 지성에 발전을 기하는 학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학문 자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이론과 철학을 가지고 평생을 풀어먹고 사는데 급급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학문 세계를 펼쳐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진실된 자세로 탐구하며 학문세계를 펼쳐나가는 사람이 무시당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무시당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국가가 피해를 본다. 국격은 진리가 진실되게 펼쳐질 때 그 격조가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곰곰히 따져보면 얼마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이것이 격물을 철저하게 해야할 이유다. 어설프게 알아챈 사람은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전체의 격조와 품격을 흩으러 놓기 십상이다. 더욱이 자기 것에 대한 고집을 끝까지 유지하는 병폐가 있다.
학문은 모르는 바를 끊임없이 묻고 캐서 알아내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잘 나고 못 나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통해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뜻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적 논리를 한사코 객관의 논증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지 편협한 논리를 고집부려서 될 일이 아니다.
필자가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은 개념 속에 운동하는 3D의 물리운동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 모든 개념 속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실재적인 물리운동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이치를 알아내는 학문을 ‘정명학’(正名學)이라고 했다.
인류는 자연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개념을 정명하면서 발전해왔다. 개념을 처음 개발하여 사용할 때는 실재의 물리운동을 훤히 알고 사용했겠지만, 후세로 올수록 그 물리적인 속성과 성격들은 차츰 잊게 되고, 그냥 말로 전달하는 개념으로만 인식·사용돼 왔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발전’이란 개념을 살펴보자. 발전(發展)이란 뜻을 사전에서는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감”이나 “일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됨”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우리는 그 뜻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원래 발전이란 말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움츠리고 펴고, 또 앉았다 일어서고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발전이라고 했다.
그런데 구부리지도 당기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을 전진(前進)이라고 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자연의 물질운동은 반드시 먼저 저쪽에서 이쪽으로 당기는 구심력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가는 원심력의 반작용을 일으키며 상호합력작용을 통해서 발전해간다.
나무도 하늘의 태양에너지로 만들어진 영양분을 저쪽의 잎을 통해 이쪽의 뿌리로 체관을 통해 영양분을 잡아당기는 한편, 땅의 물이 물관을 통해 이쪽 뿌리에서 저쪽 잎쪽으로 올라가는 생장작용을 하면서 발전해간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을 계(繼)라 했고, 이쪽에서 다시 저쪽으로 가는 것을 승(承)이라고 했다.
또 저쪽을 화(化)라 했고 이쪽을 변(變)이라고 했다. 발전의 단계는 아리스토텔레스 말처럼 시작-과정-결과의 3단계가 있다. 시작의 화(化)가 과정의 변(變)을 거쳐 결과의 새로운 화(化)를 이루며 발전한다고 했다. 만물이 계승 발전하려면 이렇게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동서고금의 물리학자나 철학자들은 말했다.
인간의 호흡도 나무의 호흡작용과 똑같다. 호흡이란 숨을 당기고 미는 것이다. 공기를 먼저 저쪽의 바깥에서 이쪽의 내몸 안으로 끌어당겨야 숨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가면서 생장작용을 한다.
활 쏘는 일도 마찬가지다. 활대는 저쪽이고 활줄은 이쪽이다. 활을 쏠 때 먼저 활대를 저쪽의 과녁에 겨냥하고 저쪽 거리에 합당한 에너지를 활줄에 실어 이쪽으로 잡아당겨서 활시위를 놓아 다시 이쪽 활에서 저쪽의 과녁으로 날아가 결과를 낳는다.
모든 일은 이렇게 시작-과정-결과라는 3단계의 생장성 변화과정을 거치며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옛 선조들은 이것을 음양운동이라고 했다. 모든 물질운동을 음양운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나의 물건이나 일 중(中)에서 굳센(剛) 저쪽의 양(陽)과 부드러운(柔) 이쪽의 음(陰)이 서로 다투어 새로운 씨를 만들면서 발전한다고 했다. 천지(天地)의 성격을 음양(陰陽)으로 구분하였고, 성질을 강유(剛柔)로 보았다. 그래서 활도 활이라는 중(中)에 굳센(剛) 활대와 부드러운(柔) 활줄로 이루어져 둘의 상호합력작용으로 화살이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호흡작용도 똑같다. 굳센 뼈와 부드러운 근육작용으로 이루어진다. 한글의 원리도 똑같다. 한 음절 중에 굳센 하늘소리 ‘초성’과 부드러운 땅의 소리 ‘종성’이 중성에서 만나 서로 다투어 한 음절의 말과 글이 생겨난다고 훈민정음해례본에서 말하고 있다.
서산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눈길을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에겐 이정표가 되리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남이 낸 길을 무작정 따라가서도 안 되지만, 길을 함부로 내서도 안 될 일이다. 지금 우리는 격물을 철저히 해서 품격을 높일 안목을 길러야 할 때다. 격물은 진실과 진리를 캐묻는 일이다. 그 진실과 진리는 내가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의 나 자신의 일 가운데 있다. 그 속에서 진리와 진실의 진주를 캐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