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약사 정윤호 일대기’···정의화 전 국회의장 부친 ‘회고’
선친 탄생 100주기 기념, “못 다한 효 1만분의 1이나마…”
국회의장을 지낸 정의화는 효자다. 2022년 세모에 <약사 정윤호 일대기>(비매품)라는 제목의 사부모곡을 출간해 내게 보냈다.
책 서문에서 “효에는 끝이 없고, 효가 없이 인간은 바로 설 수 없다” 했다. 영일 정씨 28대 포은공파인 정일화 전 국회의장의 선친은 초산 정순용의 차남으로, 만 22세에 전주이씨 근령공파 17대 손인 이순희 어머님과 혼인했다. 슬하 3남 1녀를 두고, 손자 일곱 손녀 둘에 외손자 둘까지 보았으니 다복하시다.
선친의 성품은 강직한 편으로 자기 주장이 강한 면모를 보였단다. 약사 정윤호 선생은 1922년 6월 19일 김해부 가락면 대사리에서 집안의 여섯째로 났다. 11년 뒤 부친을 따라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일본 주오대(중앙대)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1945년 11월 9일 동경지방검찰청 검사 서기보 직을 접고 귀국했다. 웅동중·건국중 교장을 역임했으나 교육계 비리를 목도하고 힘들게 한약업에 투신했다. 이후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다 2009년 2월 2일 타계했다.
정의화의 선친은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천재라고 불렸다. 요코하마 가나가와의 심상소학교에 입학, 반장을 맡았단다. 선친을 반장에 명한 일로 담임은 교장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도쿄로 이사 가 대원심상소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손재주도 좋아 미술 공예에 금상으로 수십 차례 입상했다.
정의화와 손위 형 모두 의사로 수술을 잘한 게 우연은 아니라 했다.
부친은 도쿄 최고인 도쿄부립고 심상과(45명 정원)에 합격했다. 이 학교는 졸업만 하면 바로 도쿄제국대에 입학한다는 명문이었다. 그러나 결핵성 늑막염으로 중도 포기 하고 편입시험으로 상업학교로 옮긴다. 낮에는 집에서 요양을 하고 조부께 한학과 한의학을 배우며 일손을 도왔다. 상업학교를 졸업 후 도쿄 소재 주오대 전문부 법학과 3학년 편입시험에 합격했다. 선친은 주오대와 인연을 맺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그 인연은 이어져 2016년 3월 국회의장으로 일본 중의원 오오시마 의장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했을 주오대 총장을 만나 선친 얘기로 꽃을 피웠다. 당시 200여 재학생에게 “의로써 화를 이루면 한일 양국에 큰 이익이 된다”는 주제로 특강도 했다.
선친은 태평양전쟁 발발로 대학을 한 학기만 다닌 후 조기조업을 했다. 이후 5개월간 조부 한약방 일을 도우며 법학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때 한약 공부가 나중에 한국에서 한약종상 허가를 받는 기반이 됐다. 중학교 교장을 사직한 후 한약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발판이 된 것이다.
1943년 2월 29일 도쿄 형사재판소 임용시험에 합격해 서기로 임관했다. 재판소 소속의 곽명덕(전 대한변협 회장) 주오대 선배의 도움이 컸다. 검사국 서기로 근무 중이던 1944년 5월 21일 어머니와 약혼을 했다. 아버지 22세, 어머니는 17세였다. 일곱 번째 맞선에서 모친을 만나게 됐다.
신혼여행지는 일본의 도치키현 유비소 온천장의 아부 본가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사법고등 전형고시에 합격해 형사지방재판소 검사시보에 당당히 임관했다. 임명장은 6.25 전쟁 와중에 분실했다고 한다.
당시 관례는 조선인은 판사로는 임명해도 검사로는 임명하지 않았다. “(검사 임명에) 어떤 곡절이 있었던 건지…”(정의화)
정의화의 선친은 한학을 공부해 4서3경에 통달했고, 동방이학의 조로 통한 포은(정몽주) 선조를 흠모했다. 해방 한달 후 도쿄에서 김상돈 선생을 도와 아나키스트 박열 선생의 구명에 앞장섰다. 당시 일본 법무대신을 김상돈 선생 일행과 만나 석방해달라고 설득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상돈은 일본 체류 때 도쿄코뮨에 관여했고, 선친이 조직의 홍보부장도 맡았다. 김상돈은 귀국 후 초대 서울시장으로 활약했다. 선친에게 “함께 일하자”며 종로 사무실로 연락하라고도 했다. 그후 박열은 석방돼 거류민단 단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정의화 부모님은 두 분 다 글쓰기를 좋아해 일기를 빠뜨리지 않고 썼다. 특히 젖 떼기도 전, 일본으로 이주한 모친은 한국어가 서툴러 시로 감흥을 표하곤 했다. 신랑 신부가 혼인 때 감회를 짧은 시(일본어)로 표현한 게 재미있다.
“기다린 때는 왔도다. 서늘한 가을에 반가운 친구여. 기쁘도다”(신랑)
“아름다운 꽃에 빛을 더하듯 그대의 말은 이슬을 머금은 진주”(신부)
선친 별세 후 이듬해 어머니는 신혼여행지를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정의화 의장의 부모는 금슬이 좋았던 것 같다. 모친의 지아비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신혼 때 아름다운 추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검사서기보를 접고 환국한 뒤 선친은 쉽지 않은 어려운 삶의 신산을 겪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다 1946년 웅동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임명됐다. 주로 영어 도덕 윤리 한문을 가르쳤고, 생계를 위해 모친도 동네 삯바느질을 도맡았다. 모친은 도쿄 양재학교에서 자수와 바느질을 전공해 살림에 도움이 됐다.
시골의 빡빡한 살림에서 2살 터울로 셋째 아들과 막내 딸까지 길렀다. 정의화가 났을 때 선친은 마산 사는 조부에게, “이름은 의화라고 지었다”고 했다. 한학과 주역에 능한 조부께서 이것저것 따져보신 후 갑자기 의식을 잃고 얼마 후 별세했다. 쓰러지기 전, 의와 화를 고른 이름이 좋다고 작명을 허락했다고 한다.
정의화가 두살 때 토사곽란을 하며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다. 선친이 아들을 콜레라로 잃을까 극진히 간호하던 중 잠깐 졸 때 꿈에 조부가 나타났다. “윤호야! 아이가 죽어가는데 뭐 하느냐? 빨리 인삼 얼마하고 대추 댓돈을 찹쌀과 함께 고아서 먹여라”
그 처방대로 했더니 희한하게도 변 색깔이 좋아지면서 소생했다고 한다. 선친 나이 서른에 교장으로 부임한 웅동중에는 이름 난 사람들이 나왔다. 부산의대 초대학장과 가톨릭의대 학장을 지낸 정일천 박사와 법조계에는 김동진 대구지검장과 배명인 전 법무부장관, 정계는 배명국 정의화 허대범 등이 있다. 문단에는 김동리 서정주와 활동하고, 불교문학에 업적을 남긴 김달진이 있다. 웅동중학교는 이후 조국 전 법무장관의 부친이 인수해 이사장을 맡아 화제에 올랐다.
모친은 결혼 10주년 되던 해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심경을 시로 달랬다.
‘벚꽃이 싹트는 봄마다 혹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불쌍히 여겨 지금은 그저 바람만 졸라댄다 만나게 될까’
‘신에게 맹세코 아홉 분의 술 여로는 아직 멀었지만 지금 더욱 사모한다 마음 변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아홉 번의 술’은 매년 명절 때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올린 술을 뜻할까?(정의화)
선친은 1958년 12월 30일 겨울방학 때 불같은 성격으로 대책도 없이 교육계를 떠났다. 그때 생계 문제로 어머니와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 하는 걸 정의화도 보았다. 그후 여러가지 난관을 뚫고 한약업상을 하며 집안 기틀을 일으켜 세웠다. 선친은 다양한 사회 활동 중 로타리 활동을 하다 봉생신경외과 김원목 원장과 친분을 쌓았다. 독자인 김원목 원장은 평양의전 졸업 후 단신 월남을 한 분으로 부산에서 봉생이란 이름으로 개업을 했다.
선친과 형제연을 맺은 김원목의 딸 김낸시(김남희로 개명)가 정의화의 배필이 된다. YS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권유로 15대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두게 된다. 선친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정치할 생각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박관용 의장과 최형우 장관 등의 도움으로 정의화는 부산 중동구 공천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2009년 2월 2일 향년 80세으로 선친이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선친과 지내던 부산 수정동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당뇨병 후유증으로 투석을 받다 넘어지는 바람에 휠체어 신세를 졌다.
정의화는 지극한 효자다. 지금도 부모님 머리카락을 집 제단에 보관한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쳐다보며, 내 집이 부모님 모시는 사당이라 여긴다. 부산 남천동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현관 양옆 해태 석물이 놓여 있다.
마당에는 선친이 손수 만든 석등을 전시해 두고 부모님을 늘 회상한다. 신혼여행지 현조사에서 참배하는 어머님 모습을 全紙 크기 사진으로 만들어 봉생병원 의료원장실에 걸어두고 있다.
모친은 경남 의창군 웅동면 소사리에서 태어나 한살 때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갔다가 남편을 따라 1945년 귀국했다. 꽃꽂이에 조예가 깊어 이케바나 국제 꽃꽂이클럽에서 활동했다. 2013년 9월 2일 작고했다.
정의화의 선친은 주요 삶의 분수령마다 일기를 남겼다.
“이남 의화가 부산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1학년에 입학하다. 입학시험 48등 합격”(1964년 3월 2일)
“장남 헌화 국립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입학하다. 이로써 나의 가문을 의사집안으로 조성하겠다는 포부의 기초가 이루어지게 되다.”(1964년 3월3일)
모친도 일상을 거의 빠짐없이 일기로 남겼다.
“오늘 차남이 의장 선거가 있다는 것 같다. 어떻게 되려나? 서울에서 차남이 5시에 온다는 것 같다. 차남이 국회의 선거에서 이야기를 잘했다. 48표 차로 졌다.”(2012년 6월 1일)
“차남에게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입원하기 위해 목욕 갔다 왔다.”(2013년 3월 21일)
금슬 좋게 살다간 정의화 의장의 부모님. 천상효자 정의화 형에게 거듭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