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프리뷰 & 리뷰②] 성탄절 볼만한 기념비적 종교영화 넘어 빼어난 역사영화

<탄생>, 완성도 높은 해양영화, 휴먼 드라마로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아

종교 영화로서 <탄생>과 마찬가지로 역사 영화로서 <탄생>도 더할 나위 없이 치밀하면서도 사려 깊고 균형적이다. 심지어는 겸허하기까지 하다. 세상의 모든 역사 영화는 운명적으로 ‘팩션(Faction=Fact+Fiction)’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진대, 영화는 사실성을 최대한 존중하기 위해 허구성을 최소화시킨다. 여느 충실한 역사적 고증을 넘어, 종교는 물론 역사를 향한 작가이자 감독의 각별한 예의·존중에서 비롯된 선택일 공산이 크다. 그 선택은 무엇보다 캐릭터 구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탄생> 박흥식 감독

한 학술지의 요청에 부응해 실릴 미발표 글에서 박흥식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신예 송지연이 분한 즈린·김선이 유일한 가상인물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라면 그 캐릭터를 한층 더 ‘자극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그녀와 김대건 사이에 다소의 허구적 멜로라인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넣을 법하건만, 그 역시 최소화시켰다. 감독의 전언에 의하면, 그런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편집 과정에서 들어냈단다.

캐릭터들의 대사 또한 최대한 사료를 기반으로 신중하게 창작했다. 가령 영화 후반 “현석문과 함께 죽게 되어 여한이 없다”는 대사는, 김대건 신부가 실제로 한 말로 조정 기록에도 나온단다. 영화 초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10대 중반의 김대건이 이문식이 연기한 천민 태생의 마부 조신철에게, ‘아저씨는 뭐가 그렇게 좋아 항상 웃고 있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나는 지금 이 땅이 천당이다. 죽어서 가는 천당은 천주님 만날 수 있는 더 좋은 천당이고”라고. 천주교가 아니라면 자기 같은 천민이 어떻게 조선의 대학자 정약용 집안 출신의 정하상―정약용의 조카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이다―같은 위세 높은 양반과 형제처럼 지낼 수 있겠냐, 이게 천당이 아니면 뭣이겠냐, 라고 반문하면서. 그 대사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정 출신 황일광이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을 똑같이 대해주자 실제로 했던 말을 조신철의 대사로 옮긴 것’이다.

영화 <탄생>

모방 신부가 옹기 교우촌 장면에서, “함께 천주님 모시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누고, 여기는 예수님 뜻대로 사는 초대교회 같다”는 대사를 읊조리는데, 그 역시 제8대 조선교구장이었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보고서에 실려 있는 것이다. 열정이 지나쳐 ‘무모’하다는 지적까지 심심치 않게 들어야 했던 김대건의 성정을 축약적으로 제시하는 “길은 걸어가면 그 뒤에 생기는 법”이라는 대사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렇다고 영화의 그런 조심스러운 노선이 마냥 좋다는 것은 아니다. 기념비적 종교 영화에 만족할 게 아니라면, 순제작비만 100억 이상이 투하된 대중적 상업 영화를 목표했다면, 설사 선정성 등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에 걸 맞는 대중 영화적 요소들이 담겼어야 한다는 비판 내지 비호감이 없을 수는 없다. 영화가 마땅치 않은 이들에게는 영화의 그런 신중함이 일종이 ‘자기검열 아니냐’는 등의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대다수 여느 상업 영화들과는 달리, 악당적 캐릭터들이 없는 것도 크고 작은 불만의 이유일 수 있다. 조정이 금한 천주를 향한 믿음으로 인해 순교나 배교의 기로에 놓여야 했던 천주교인들을 피해자들, 즉 주인공들로 그 상대역들을 적대자들(Antagonists) 즉 악당들로 설정·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20일 오후 감독, 투자자 등과 함께 영화를 관람한 후 가졌던 저녁 자리에서, 10권이 모두 베스트셀러였던 장편 소설 <인간시장>(1981~1989)의 김홍신 작가도 그런 취지의 아쉬움 섞인 바람을 피력했다.

영화 <탄생>의 장면들

물론 악당이 부재하는 영화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떠오르는 대표적 예만 해도 이한 감독의 <완득이>(2011)나 봉준호의 <기생충>(2019) 등 소위 ‘대박’을 터뜨린 영화들이 있다. 더욱이 언제부터인가 선악의 경계의 와해·붕괴는 영화 내러티브의 어떤 경향으로 굳혀진 감도 없지 않다.김성수 감독의 <아수라>(2016)처럼, 선인이라고는 아예 찾아볼 수 없고 누가 더 악당인가 대결을 벌이는 듯한, 그래 끝내 영화의 중심인물 모두가 죽는, 대중 영화로서는 모험적인, 너무나도 모험적인 예외적 시도도 없지 않다. 따라서 <탄생>에서의 지독한 악당 캐릭터가 없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바 없거니와, 결점이라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로 인해 대중 영화적 감흥이 적잖이 감소한 것만은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상기 저녁 환담에서 ‘<탄생>의 악당은 다름 아닌 시대’라는 의견들이 오갔다. 가벼운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으나, 그저 웃어넘기기 쉽지 않은 육중한 발언이었다. 우리만이 아니다. 인류는 단지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바쳐야 했던 ‘야만의 시대’를 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종교로 인한 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요, 신앙을 지니고 있건 않건 종교는 우리 인간의 핵심적 화두가 아닌가. 오죽하면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며, ‘이대로 가면 종교는 끝!’이라는 유튜브 프로그램도 선보이지 않았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U_cu4eSuAY)

영화 <탄생>은 오늘날의 눈으로 바라보면 야만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그 시대를 그렇게 말하지도,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 시대를 악으로 단죄하기는커녕 마구잡이로 판단하거나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제가 김대건 신부를 재해석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참모습을 조금 더 드러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감독의 말이 진심으로 다가서는 것은 그래서다. 주관을 피할 수 없되 가능한 객관적이며 변증법적이려고 무던히 애쓰는 영화의 역사적 시선은 19세기 초반 조선과 청의 관계 설정‧묘사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대등한 교류의 실용적 시선으로 그 관계를 그리는 것. 으레 왕과 신하의 상명하복적으로 그려져 오곤 했던 양국관계를 그렇게 성숙하게 바라보는 영화의 관점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친 ‘국뽕적(?) 시각’이요 혹 일종의 역사왜곡 아니냐고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심지어는 스쳐지나가듯 나오는 왜에 대한 언급도 예의 ‘왜놈’이 아니라 ‘왜인’으로서의 그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호출하면서 조선 판옥선의 우수함을 강변할 때도, 김대건은 ‘그놈의 왜’를 향해 그 흔한 욕설을 퍼붓기는커녕 폄하하지조차 않는다. 그만큼 영화는 역사를 향해 신중을 기한다. 감독이 한 방송 인터뷰(https://www.youtube.com/watch?v=xGeSTh_k8xA)에서, “종교 영화를 넘어서서 조선 근대의 탄생을 다룬 역사 영화로 봐주셨으면 저는 좋겠습니다”라는 바람을 전한 것은, 위와 같은 맥락(Context)에서일 게다.

<탄생>은 이른바 ‘해양 영화’로서도 남다른 주목을 요한다. <탄생>이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1989)나 이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2012) 같은 전격적 의미에서의 해양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여로 모로 해양 영화적 속성을 과시한다. 적잖은 해양 시퀀스들은 말할 것 없고 해양 국가로서의 조선의 입지를 역설하는 김대건의 대사를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관련해 김태만 국립해양박물관장의 감상평을 빌려와보자. 그는 페이스북에서 오랜만에 보는 수작으로, 학생들과 함께 본 후 토론해 보고 싶은 ‘영화 <탄생>을 읽는 세 가지 코드’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전략)마지막으로 <탄생>은 보기 드문 해양 영화다. 소년 김대건이 마카오로 사제학습을 위해 떠난(1837년) 여정은 중국 내륙을 관통해 하강하는 육로였다. 그러나 신학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여정은 대부분 해로(海路)다. 프랑스 군함 에리곤 호를 얻어 타고 마닐라를 출발해 조선을 향해 항해했던 경험은 김대건을 유능한 항해사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
항해 도중 배에서 체험한 나침반, 망원경, 육분의, 아스트롤라베 등 항해 도구는 그의 해양에 관한 안목을 혁신했다. 귀국해서는 연평도에서 상해까지의 항로를 개척했고, 상해에서 태안까지의 항해도 성공했다. 한중 간 해로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파손되거나 제주도로 떠내려가는 해난 사고도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항로와 항해술에 능한 대항해사로서의 지식과 체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화에서 태풍과 맞서 싸우는 장면도 매우 실감나게 전개된다. 특히, 조선전도를 그린 김정호는 국민 모두가 다 알지만,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전도>는 모르는 이가 많다. 그가 그린 조선전도는 해양 특히, 한반도 주변의 섬들이 과장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방 국경 지역의 철통같은 방비를 피하기 위해 해양을 택했고, 때문에 해양에 대해 특히 더 많은 지식을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탄생>

그렇다면 김대건 신부는 항해술을 어디서 배웠을까? 감독은 이렇게 전한다. “당시 불란서의 첨단 군함인 에리곤호에 세실 함장의 통역관으로 6, 7개월 동안 승선한 것이 단서를 제공한다”고. 그 배에 3대째 지리학자로 활약하던 프랑수아 알렉상드르 마르슈(François Alexandre Delamarche)—감독은 들라마르셔로 썼지만, 표준 표기에 따라 마르슈로 썼다—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고,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민간인이니 선실도 같은 방이나 옆방을 쓰면서 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영화에서도 김대건이 프랑수아에게, 태양이나 달의 고도각(altitude angle)이나 두 천체 간 각거리(angular distance)를 측정하고 그것을 통해 그 위치에서의 위도(latitude)와 경도(longitude)를 알아내는 데 사용되는 육분의(Sextant)를 빌려 쓰고, 끝내 선물로 받으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상세히 묘사된다.

김태만 관장은 신간 <해양인문학-다시 생각하는 해양문명과 해양성>(호밀밭, 2022년 11월)의 4장 ‘해양인문학을 위하여’에서 해양문화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규정한다. 바다를 건너려는 성질인 섭해성(涉海性), 상호연동성, 상업성과 영리성, 개방성과 모험성, 그리고 심미성이다. 그 어느 것도 영화 <탄생>에 해당되지 않는 속성은 없다. 그러니 어찌 <탄생>이 ‘보기 드문 해양 영화’가 아니겠는가!

‘마침내’ 휴먼 드라마로서 <탄생>을 짚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영화의 부제 ‘조선 근대를 열어젖힌 한 사내의 모험’이 그 성격을 축약적으로 제시한다. 19세기 초반의 조선 시대를 <탄생>처럼 균형감을 잃지 않으면서 사려 깊게 그린 역사 영화를 필자는 만난 적이 없다. 그렇게 극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고 유의미한 모험을 목격한 적도 없다. 한데 그 사내는 조선 최초의 신부로서, 실제 했던 역사적 인물이다. 감독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흔히 조선 근대의 기점을 1876년 강화도조약, 즉 개항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역설한다. 사상사적으로는 패관잡기의 유행, 미륵불이나 정감록에 기반한 구원설의 등장, 양반을 배제하고 진행된 문양해 모반사건, 천주교의 등장 등 유학에서 탈피해 스스로 생각하는 움직임들이 분출했던 정조말로 봐야 할 것 같다고. 그 연장선상에서 김대건 신부와 그 동지들이 한 시대를 ‘열어젖혔다’는 것이다. 그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여부는 물론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사실 여태껏 상술한 각 장르적 속성은 결국 휴먼 드라마로 수렴된다. 종교성과 역사성, 해양성 등을 두루 겸비한 전기성 휴먼드라마로서 <탄생>에 말이다. 이미 <탄생>의 강점‧약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진단했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주연‧조연은 말할 것 없고 단역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은 족히 될 배우들의 열연을 향해서는 말로 형용키 불가능한 상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빈말이 아니라 흠 잡을 데가 거의 없다는 내 총평이다. 21세기 들어 한국 영화가 심심치 않게 멀티캐스팅으로 치닫고 있는 경우들이 적잖은 바, 그 정점을 구현했다면 어떨까. <기생충>이나 김한민의 <한산: 용의 출현>(2022) 등에 버금가며, 출연진 수치에서는 그들을 압도한다. 특히 혈액암 와중에 도전한 안성기의 ‘서툴지만 진심 가득한’ 연기에 감동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백혈병 와중에 출연한 안성기(왼쪽) 

필자가 네 번이나 영화관에서 이미 본 영화를 보고 또 볼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 연기의 맛과 멋에 빠져서다. 2시간반 여의 짧지 않은 러닝 타임도 매번 짧게 느껴지는 것도 다른 그 어떤 요인보다 그 때문이다.

연기만 최고라는 의미는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변해왔듯 잘 만든 영화는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근접도(Proximity)와 강약과 완급 등을 효과적으로 갖춘 내러티브 호흡을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데, <탄생>도 그런 영화다. 한데 <탄생>은 종교 영화로서도, 역사 영화로서도, 해양 영화로서도, 휴먼 드라마로서도 흔치 않은 경지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각 장르 별로 성공을 이룬 영화들은 적잖지만, 그 모든 장르에서 공히 <탄생>과 같은 수준을 일궈낸 영화를 나는 모른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아가 영화는 내 사유를, 내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러니 어찌 내가 <탄생>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허우적거림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여부는 고백컨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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