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첫눈이 함박 내리면’ 박노해

첫눈을 맞이하는 곶감

첫눈이 함박 내렸다
산과 들을 덮고 길을 덮고
지붕과 골목을 덮었다

세상이 하얗게 덮이자
모든 것이 엉금엉금 느려지고
모든 것이 더 가까워졌다

땅속의 벌레들도
겨울 숲의 나무들도
거리를 걷는 연인들도
더 가까워졌다

사람들이 서로 갈라지고
세계가 날카롭게 맞설 때
큰 눈은 내려 천지간을
순백의 가슴으로 품었다

함박눈은 푹푹 내려
앞섰다고 뒤졌다고 내달리는
차가운 마음들을
순한 새끼 짐승처럼
크게 안아 아장아장 걸리신다

한번쯤 느린 걸음으로
깨끗한 순백의 마음으로
환하게 가슴 시려 보라고
큰 눈은 푹푹 잘도 내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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