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주기 고봉 기대승-퇴계 이황, 26살 차이 극복 경이로운 세교
조선유학사 빛나는 발자취 넘어선 상호존중의 극치
퇴계-고봉 배향의 도산-월봉서원장 김병일도 감동
23일 ‘다시 고봉을 만나다’…고유제, 토크쇼, 강연회 등
올해는 고봉 기대승 선생 서거 450주년이다. 한국학호남진흥원과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주최하고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이 주관하는 ‘다시 고봉을 만나다’ 주제 아래 월봉서원에서 고봉 선생을 기리는 고유제가 23일 봉헌된다. 17일부터 다양한 행사가 계속된 가운데 토크쇼와 릴레이 기념 강연, 시낭송 및 창작가곡 공연도 한다.
#1569년 3월, 고봉과 퇴계의 작별
1569년 3월 봄, 고봉 기대승(1527-1572)은 동호나루에서 퇴계 이황(1501-1570)과 헤어졌다. 퇴계는 고향인 경상도 예안의 도산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 퇴계는 선조와 면담했다. 면담을 주선한 이는 26세 연하로 퇴계와 서신을 주고 받은 불세출의 천재 고봉이었다.
퇴계와 작별 전 1568년 12월, 즉위 1년 남짓 임금 선조에게 퇴계를 만나보라 권했다. 사림의 영수 격인 퇴계를 추천, 국정 운영과 학문에 대해 듣도록 선조에게 청했다. 사림이 정국을 주도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조정의 중심을 잡을 인물로 퇴계를 추천했다. 고봉의 건의로 선조는 이듬해 3월 퇴계를 궁궐로 불렀다.
왕과 면담 자리에서 퇴계는 고봉을 ‘통유(通儒)’로 추천했다. 통유란 유학 이치에 통달한 석학을 지칭하는 말이다. 퇴계가 고봉을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임금 앞에 선언한 셈이다.
며칠 후 퇴계는 동호의 강가에서 향리인 예안 도산으로 떠났다. 퇴계가 안동으로 떠나는 날, 고봉은 전별하는 배 위에서 퇴계에게 이별 시를 전했다.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니
떠나시는 우리 선생 어찌하면 만류하리
강변에서 닻줄 끌고 이리저리 배회할 제
애에 가득한 이 시름을 어이하리
고봉의 시를 받은 퇴계는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 명류이니
돌아가고픈 마음 종일토록 매여 있네
이 한강수 떠다 벼룻물로 써서
끝없는 작별 시름 써 볼거나
퇴계가 도성을 떠나면서 고봉과 주고받은 시편은 이별의 감회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떠나는 선생을 붙들지 못해 닻줄만 끌고 다닌, 고봉의 시 ‘애에 가득한 시름’도 절창이다. 스승을 보내는 고봉의 심정이 처연하다 못해 지극하게 피부에 닿는다. 그에 못지 않게 퇴계 역시 빼어난 후학들과 헤어짐에 아쉬움을 느꼈다.
고봉은 중앙에 진출한 후, 강직하고 직선적인 성품과 언행으로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자신을 지음(知音) 해준 퇴계만이 유일하게 ‘마음의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퇴계는 고봉을 독려하거나 타이르면서 격려 또한 아끼지 않았던 참스승이다. 헤어질 때, 고봉은 연로한 퇴계를 생전에 더는 못 만날 것만 같은 애달픔이 가득했다. 당시 조정에는 서인의 세가 약화하고 동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선조는 제대로 임금 수업도 받지 못한 채 권좌에 올라 믿고 의지할 정치 세력도 없었다. 그런 복잡다단한 정국에서 믿고 의지할 선생을 떠나보내는 심경이 오죽했겠나? 게다가 학문의 이상을 함께 펴나가, 조정의 중심을 잡을 ‘동지’이자 ‘지주’를 떠나보내니…
그 불순한 시대를 혼자 껴안아야 할 힘겨움에 고봉은 더욱 애닯아 한 것이리라.
#1570년 2월, 고봉의 떠남
1570년 2월, 마흔넷의 고봉은 서울을 떠나 향리인 광산으로 낙향했다. 도성을 떠나던 날, 함께 한 벗들이 고봉과 작별하기 위해 한강가로 왔다. 고봉은 김계, 김취려 등과 동호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회한에 젖었다. 1년 전 퇴계와 이별한 그때 자리에 고봉 역시 실존적으로 마주한 것이다.
고봉은 그 감회를 시로 이렇게 읊었다.
세월은 유유히 물처럼 흐르는데
천기도 이와 같아 멈추질 않는구려
지난해 작별하며 가슴 아파했던 곳
오늘 귀향길도 근심만 절로 나네
고봉은 쉼 없이 흐르는 강물을 그저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세상사는 흘러가는 물 같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저문 강에서 바라보는 물빛이 스승과의 작별을 떠올렸다. 해가 지나고, 그래서 기억의 시간은 한층 더 먹먹하고 아프게 고봉에게 다가왔다.
만남은 늘 속절없는 이별을 예상하고 있지만, 고봉의 가슴 한켠에는 참담함이 감돌았다. 게다가 벗들과 헤어짐을 아쉬워 한 데가 스승과 아프게 작별한 바로 그곳이라서였다.
#1558년 11월, 고봉과 퇴계의 첫 만남
1558년 11월, 32세의 햇병아리 선비 고봉은 서울에 와 있던 58세 퇴계를 만났다. 11월 2일, 문과 급제방이 붙은 후 축하 행사를 마치고 서소문 퇴계의 집을 찾은 거다. 퇴계가 1558년 11월 초, 고봉에게 보낸 첫 편지는 감동이다.
병든 몸이 문밖을 나가지 못했는데 어제 찾아줘 소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몹시 고맙기도 하고 매우 부끄럽기도 하여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일 남행은 결정하셨습니까? 겨울철에 먼 길을 떠나는 데는 몸조심이 상책입니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대업을 궁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고봉은 1559년 1월 5일자 편지를 다시 받고, 두달 뒤 퇴계 선생에게 답신을 보낸다.
“… 연전에 문하를 방문하여 서론을 듣고는 개발된 것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사단칠정에 대한 논의는 제가 평생 깊이 의심해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식견이 아직도 분명치 못하고 어렴풋한데, 어찌 감히 망령된 말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선생께서 고치신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 보니 의심이 풀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는 먼저 리와 기에 대해서 분명히 안 뒤에야 심성정의 뜻이 모두 낙착되는 곳이 있어서 사단칠정도 분별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퇴계에게 첫 편지를 보낸 1559년 3월 5일, 고봉은 전라도에 머물었다. 고봉은 ‘사단칠정’을 확신할 순 없다고 겸양했지만, ‘평생 깊이 의심(平生深疑)’을 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 누구보다 학문적 자부심이 강했다. 33살 애숭이 선비가 59세 노장에게 ‘평생심의’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썼을 정도이니…
퇴계와 고봉을 배향하는 도산서원과 월봉서원의 장을 맞고 있는 김병일 선생은 말했다. “서울대 총장(대제학급)을 하는 사람에게 교육부 수습 사무관이 진리가 어떻고 세상 이치가 어떻다고 한 셈이다. ‘사칠쟁론(조선 유교사에 빛나는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에 관해 그런 얘기를 고봉이 한 걸 전해 듣고 길게 1만자 가깝게 서신을 보냈다. 요즘 한글로라면 3만자 가깝다. 그 긴 편지에서 퇴계는 스스로를 ‘황’이라고 최대한 낮췄다. 고봉을 ‘公(공)’이라고 높여 칭한 퇴계 선생의 품과 격의 높음이야…”
필자는 최근 김병일 선생과 참 오랜만에 해후해 막걸리잔을 나눴다. 언제 봬도 맑고 기품이 훌륭한 퇴계 지킴이의 선봉이나 다름없다.
도성 밖 서소문 퇴계 집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나 서로를 허여하는 사이가 됐다. 두 위대한 유학자들은 교류를 오래 지속했다. 서로 知音할 수 있는 ‘도반’이라서다. 고봉과 퇴계는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은 적은 없다. 하지만 고봉은 퇴계에게 학문과 삶의 도리를 배우고 가르침도 청했다. 고봉은 스스로 ‘후학(後學)’이라고 칭하면서 퇴계를 ‘선생(先生)’이라고 높였다. 퇴계는 역시 26세 연하의 고봉을 깍듯이 예우하면서 ‘공’ 또는 ‘오우(吾友)’라고 칭했다.
‘스승 제자’의 연을 맺지 않았지만, 서로 존중하면서도 이물 없는 참으로 묘한 관계였다. 고봉과 퇴계의 사귐은 <고봉집>의 ‘양선생왕복서’에 잘 나타나 있다. 퇴계에게 고봉은 ‘학문의 벗’이었고, 고봉에게 퇴계는 ‘자상하고 엄격한 스승’이었다. 성리학을 공유한 사림으로 서로 존중과 신뢰로 나이를 뛰어넘어 만남을 지속할 수 있었다.
#1571년 3월, 영원한 이별
1569년 봄날, 동호에서의 작별 후 퇴계는 1570년 12월 ‘하늘의 별’이 됐다. 이듬해 봄날, 고봉은 벗들과 광주 읍성에서 동쪽으로 십리 떨어진 서석산(무등산)에 올랐다. 문수암에서 유숙한 후, 전(奠)을 올리고 동쪽을 바라보며 시 ‘감음(感吟)’을 지어 읊는다.
선생은 세상 싫어 백운향 가셨는데
천한 이 몸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멀리 생각하니 오늘 가성에 묻히시어
서산의 궂은 안개 점점 망망하리라
그해 3월 21일 경상도 안동(예안)에서는 퇴계 선생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예안의 건지산 언덕에 퇴계의 유택이 마련됐다. 원근의 사대부와 유생 300여명이 참석하고 국장의 예를 갖추어 엄수됐다.
고봉은 건강이 좋지 않아 먼 길을 떠나 퇴계 영전에 직접 조문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고봉은 문인들과 무등산 정상에 올라 퇴계를 떠나보낸 거다. 전라도 광산의 고봉과 경상도 예안의 퇴계는 26세라는 부자 간 나이 차를 넘어 세교했다.
1550년대 말부터 10여년 교류한 두 분의 희한한 연에 세인들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서로 내밀한 감정과 깊은 사유를 나누면서도 외부의 시선과 공적 관계까지 세심하게 고려했다. 두 위대한 학자들 간 만남과 교류는 공감이 없이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에스프리였다.
퇴계와 고봉 사이 오고간 변난(辯難)을 모은 게 3권 3본의 목판본(저자 기대승, 이황)으로 나왔다. 태극(太極)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해 의견이 달라 편지를 왕복하며 변난한 서찰 내용들이다.
<퇴계집>과 <고봉집> 및 <사단칠정분리왕복서>(四端七情分理往復書)에도 실려 있다. 월봉서원에서 얼마 전 작고한 조순 선생에 이어 서원의 장으로 김병일 선생을 모시려 했다. 김병일은 한사코 고사했으나, 고봉 후손들이 “10고초려라도 하겠다”는 말에 두 손을 들었다. “경상도 전라도 오가는 길이 그리 좋지 않은데,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되나 라는 조바심에 그만…” 김병일은 “고봉 가문에서 퇴계 가문을 높이고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에 감동했다”고 전한다.
김병일 선생이 담담하게 말했다. “퇴계 선생을 공부하면서 나는 반성을 많이 했다. 퇴계 선생이 첫 부인과 사별 후 조금 모자란 부인을 맞이했다. 차례나 제를 지낼 때 둘째 부인이 제사상에 놓은 밤이나 과일을 몰래 먹는 걸 봤다. 그래도 나무라지 않고 ‘다음에는 그러지 마세요’라고 웃으면서 타이르기만 했다.”
퇴계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아들들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내 삶의 도리나 학문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참으로 자상한 애비이기도 했다. 대학자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완벽한 삶을 살고자 한 퇴계 선생은 나의 영원한 사표다.”
고봉보다는 퇴계가 그 도저한 위대함에서 한 수 위라고 나는 품평한다. 학문적 깊이야 두사람 간에 우열을 가르기 힘들 테고, 다만 지행합일의 인간됨이나 수양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겸손은 하늘마저 감동시킨다.” 겸손감천(謙遜感天)의 대명사가 바로 퇴계 선생이라서 하는 말이다.
“퇴계 선생이 임금 앞에서나 그러는 이름자 ‘황’으로 자신을 칭해 한없이 낮추며 26세 아래의 고봉을 ‘공’이라고 드높인 마음, 고봉이 쟁론을 하면서도 선생의 높은 가르침을 배우려 한 것은 경이롭다. 퇴계와 고봉, 두 분이 맺은 지극한 관계의 의미는 오늘에도 되새길 가치가 있다.”
퇴계의 뒤를 좇고 존숭하는 김병일 역시 위대한 삶 근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