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가을 어록’ 이기철

결실은 열매들에겐 백 년 전의 의상을 꺼내 입는 일/그런 때 씨앗의 무언은/겨울을 함께 지낼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이정보 작가>

백 리 밖의 원경이 걸어와 근경이 되는
가을은 색깔을 사랑해야 할 때이다
이 풍경을 기록하느라 바람은 서사를 짜고
사람은 그 서사를 무문자로 읽는다

열매들은 햇살이 남긴 지상의 기록이다
작은 씨앗 하나에 든 가을 문장을 읽다가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다

낙과들도 한 번은 지상을 물들였기에
과일을 따는 손들은 가을의 체온을 느낀다
예감에 젖은 사람들이 햇살의 방명록에 서명을 마치면
익은 것들의 육체가 고요하고 견고해진다

결실은 열매들에겐 백 년 전의 의상을 꺼내 입는 일
그런 때 씨앗의 무언은
겨울을 함께 지낼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내 시는 씨앗의 침묵을 기록하는 일
바람이 못다 그린 그림을
없는 물감으로 채색하는 일

– 이기철(1943~ ) 시집 <나무, 나의 모국어>, 민음사, 2012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