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어떻게 피면 들국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 이기철
혼자 있는 날은 적막의 페이지를 센다
페이지마다 햇볕에 말린 참깨 알 소리가 난다
여기 수천 번 다녀간 가을이 갈대 화환을 들고
또 고요의 가슴을 딛고 와 커튼을 젖힐 때
새 떼는 우짖고 들국은 까닭 모르고 희어진다
심근경색인 바람이 혼자 불고 냇물은 살을 여미며 흘러간다
조금쯤은 괴로울 줄도 알아야 살아 있는 것이다
끼니마다 내는 수저 소리가 모두 음악일 순 없지 않느냐
고독이여 내 한껏 사랑하고도 남은 사랑이여
흙의 냄새를 깊이 마신 저 꽃은 필수록 고요하다
오래 살았으면 화려한 병력 하나라도 지녀야 한다고
들국 앉은 옆자리에 들국만 한 집 한 채 지어 보는 오늘
길에 살을 다 내어 준 돌맹이가 햇볕에 심줄을 드러내고 있다
하루가 야위고 야위어서 가시가 된 나뭇가지여
묻노니, 어떻게 피면 들국만큼 고요해질 수 있느냐
-이기철(1943~) 시집, <나무, 나의 모국어>, 민음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