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수위水位를 바라본다’ 박노해
노동산 자락에 자리 잡은 우리 동네
마당가에 서면 저수지가 보이고
그 아래 층층의 다락논이 보이고
긴 방죽 너머 갯벌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가뭄이 오고 논밭이 갈라질 때면
저수지 바닥까지 내려가는 수위를 보며
다들 애가 타고 어린 나도 속이 탔다
그러다 장마가 지고 수위가 넘실대면
빗속에서 둑을 메우고 방죽을 막는
어른들 틈에서 나 또한 속이 울렁이고
터질 듯 거대한 수위에 전율하곤 했다
수위水位
물의 크기, 물의 높이, 물의 눈금
수위가 바닥나거나 범람할 때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눈금이었지만
수위가 알맞을 때면 풍요와 감사의
노래가 울리는 오선지였으니
오늘 나는
우리 시대의 수위를 바라본다
불만과 불신의 수위
불안과 우울의 수위
탐욕과 무례의 수위
분노와 혐오의 수위
우리들 영혼의 수위는 어찌 되었는가
우리들 양심의 수위는 어찌 되었는가
우리들 고귀함과 아름다움의 수위는,
우리들 희망의 수위는 어찌 되었는가
나는 다시 속이 탄다
바닥이 갈라지는 고갈의 수위가
나는 지금 전율한다
정점에 도달하는 범람의 수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