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묵상] 왜 하필 나일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원인과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이 몸을 치십니까? 기껏 하나님의 자비나 빌어야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이 몸을, 어찌하여 그렇게 세게 치십니까?”(욥 30:24)
욥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인과율이 중요했습니다. 다만 욥과 친구들의 생각이 갈리는 부분은,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욥의 생각이고 그 원인이 욥에게 있다는 것이 친구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욥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들에 대해서 인과론적인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욥기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유독 고난과 고통에 관해서만 집요하게 이유와 원인을 따진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겪는 좋은 일도 있고, 예기치 못했던 기쁨을 맛보는 순간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감동을 선사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대체로 우리는 기쁨을 누리는데 집중을 하지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줄 모릅니다.
생각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깊이가 고난과 고통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나요? ‘내가 왜 이런 슬픔을 당해야 하나?’ ‘나에게 왜 이런 기쁨이 찾아왔을까?’ 어느 쪽이 더 익숙하신가요?
인간이 인과율에 굉장히 집착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인과론적 사고에 물들었다고 하기 보다 그냥 이기적인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을 추적하고,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집요함만큼, 나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깊이 헤아려보는 진지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찬양 중에 ‘왜 날 사랑하나?'(Why should He love me so?)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찬양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찬양을 되뇌어보려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은혜로 견디고 이기는 것입니다. 답을 찾는 것은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석문섭 목사의 오디오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