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묵상] 친밀함의 함정, 친밀함의 본질

저 장미꽃 위에 이슬 곡과 가사

“언제까지 너희는 불공평한 재판을 하려는가? 언제까지 악인에게 편들려는가?”(시편 82:2)

불공평한 재판을 했겠습니까? 악인의 편을 들었겠습니까?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는 판결이 내려졌을 때, 판결의 수혜자에게 물어보면 공평한 판결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악인의 편을 왜 드는걸까요? 본인 생각에는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편을 드는 것입니다.

친한 사람 치고 악한 사람 없습니다. 친해지면 다 착한 사람입니다. 내 편 들어주는 사람 치고 악한 사람 없습니다. 나에게 잘하면 착한 사람입니다.

금품이나 뇌물이 오고가면 악한지 알기나 하죠. 그러나 친밀함이 오고 가다 보면 자칫 분별력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정의를 왜곡하는 건 정(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편인가? 나랑 친한 사람인가? 그렇게 서로 마음 맞는 사람끼리만 뭉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들 잘 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악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연합하고 한 마음이 되어 불공평한 재판을 하고 악인의 편을 듭니다.

이것이 친밀함이 가진 함정 아닐까요?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의 친밀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친밀함이란 무엇일까요?

다윗과 요나단이 왕위를 사이에 두었다면 원수지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의 관계는 하나님을 사이에 둔 사이였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그들의 성격과 하는 행동을 볼 때 진작에 깨졌어야 할 관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성도의 친밀함이란 사람들끼리의 친밀함이기 전에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친화력입니다. 내 편인 사람과는 얼마 못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과는 끝까지 가는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석문섭 목사의 오디오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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