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타운과 3.1절···”해외한인 역할 2세, 3세에 널리 정확히 알려야”
1914년 7월 28일부터 4년 4개월에 걸쳐 약 9백만명의 인명 피해를 낸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끝났다. 1차 대전이 끝나기 1년여 전인 1917년 10월 29일 뉴욕의 맥칼핀호텔에서 소약속국동맹회의가 열렸다. 세계 강국들에 의해 점령 및 압박을 받고 있던 국가들의 대표들이 모여서 1차 대전 이후 평화회의에 제출할 의안 작성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재미한인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하와이의 박용만을 대표로 보냈다.
그리고 2개월 반이 지난 1918년 1월 8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 의회에서 14개조의 ‘평화 원칙’을 연설하였다. ‘평화 원칙’ 제 5조는 “피지배민족(식민지나 점령지역)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自決權)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자결의 원칙’이 천명된 것이다.
이 ‘민족자결의 원칙’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중국에 있던 여운형은 윌슨의 ‘평화 원칙’이 기본이 되어, 1차 대전 전후처리를 위해 개최된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담에 조선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김규식을 파견했다. 또한 여운형과 김약연(윤동주의 외삼촌) 등이 1919년 2월초에 해외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선언서였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기초한 조소앙은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유학중이던 백관수, 이광수 등을 지도하여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500여 명의 조선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외에서 고조된 조선 독립의 열기와 때마침 발생한 고종의 독살설 등이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종로의 태화관에서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후 3.1만세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4월 30일까지 지속된 만세시위는 전국 각지에서 1,214회, 총 106만여명이 참가, 553명 사망, 1만 2천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인구가 1천 7백만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거국적인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외에서 불이 지펴지기 시작하여 국내에서 활활 타오른 3.1운동의 열기는 다시 해외 동포사회로 퍼져 나갔다. 1919년 3월 13일 연변 용정 세전벌에 2만여명이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북간도의 3.13 만세운동은 5월 1일까지 이어져 북간도의 전 지역에서 연인원 13만명 이상이 참여한 북간도의 한인사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국내의 3.1운동 소식이 육로를 통해 3월 8일 러시아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 전달되자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이 앞장서서, 3월 17일 오전 9시 우스리스크의 동흥학교 앞 광장에서 2천여명의 조선인들이 모여 러시아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3.1운동의 여파는 4월 11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결과를 낳았다.
또한 3.1운동은 3월 9일 현순 목사에 의해 미국에 알려졌다. 이에 서재필과 이승만이 주축이 되어 4월 14일 필라델피아 시내 리틀극장에서 각지에서 온 20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위한 대회를 개최했다. 대회 후 참가자들은 필라델피아 독립회관까지 시가행진을 하며 조선의 독립을 미국 주류사회에 알렸다. 이후 서재필은 ‘한국친우동맹’,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미국에서 외교사업을 펼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의 독립 활동을 돕기 위해 5백만 달러 모금을 목표로 공채표를 발행했다. 당시 하와이 노동자의 월급이 18달러에 불과했음에도 공채구입은 하와이와 미주대륙뿐만 아니라 멕시코, 쿠바의 한인들에까지 이어졌다.
해외의 코리아타운들에서는 3.1절 기념식에서 3.1운동은 국내와 해외에서 합심하여 이루어진 범세계적인 한민족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함께 기려야 한다. 특히 3.1운동에서의 해외 한인들의 역할에 대해서 2세, 3세 자녀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해외의 한인 후손들도 3.1운동이 그냥 한국 역사책에 나오는 항일운동이나 만세 3창 부르고 끝내는 기념식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이민 선조들이 겪었던 ‘자유’를 위해 항거한 자랑스러운 역사로 인식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