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잃어버린 정치·종교·교육·노동, 광야로 돌아오라”

왕의 비리를 지적하다 목이 잘린 세례요한. 그는 광야를 다니며 진리를 전했다. 그림은 ‘세례 요한의 머리와 살로메’ 

[아시아엔=김종수 목포산돌교회 담임목사, 전남 NCC회장, 목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신약성서 복음서들 중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의 첫 배경은 광야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예언자 엘리야가 올 것이라는 구약성서의 증언이 있는데 요한이 영락없는 그 엘리야다.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는 왕권이 수립되면서 등장한다. 왕의 부당한 권력 남용, 억압, 그로 인한 부정과 부패, 그리고 비리를 고발한다.

예언자란 미래를 알아맞히는 점쟁이가 아니다. 히브리어로 예언자는 ‘나비’라고 하는데 이 말은 ‘대신 전하다’는 히브리어 ‘나바’에서 온 말이다. 누구의 말을 대신 전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래서 실질적인 내용으로는 ‘대언자’다. 그러나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미래에 성취되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권력의 불의에 대해 두려웠지만 사심 없이, 가감 없이 전했다. 그러려면 왕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만일 왕의 눈치를 본다면, 왕이 주는 녹에 기대며 산다면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는가?

이제 예언자들이 왜 광야에 살았는지 알 것이다. 광야는 제도권 밖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가죽 옷, 털옷을 입고 영양가 있는 메뚜기와 들꿀 등 자연산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잘 입고 잘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도권 밖 광야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도권 권력과 그것에 기생하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도 세례를 받고자 왔다는 것이다.

세례란 헬라어로 ‘밥티스마’인데 ‘씻다’라는 뜻의 헬라어 ‘밥티조’에서 나왔다. 그러나 강물에 몸을 담갔다고 사람이 깨끗해지는가? 몸만 잠시 깨끗해질 뿐이다. 교회에서 물 몇 방울 떨어뜨렸다고 인간이 달라지던가? 종교도 제도화되면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이 보기에 물 한 번 담그고 죄를 씻겠다고 오는 종교지도자들을 잘 봤겠는가?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욕을 거침없이 해댄다. 아마도 이런 욕먹으러 오는 신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또한 교회도 이렇게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가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의 삶과 그의 가르침이 세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광야가 권력과 거리를 둔 위치라는 의미라는 점에 있어서 신약성서 복음서는 ‘광야’라는 말을 명사로 쓰지 않았다. 광야는 헬라어로 ‘호 에레모스’인데 ‘호’는 관사이고 ‘에레모스’는 형용사로 ‘외딴’, ‘한적한’이라는 뜻이다. 명사를 쓰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다. 제도권과 거리를 두겠다는 것이다. 사람은 관계도 중요하지만 경계는 더 중요하다. 권력에 대해 경계가 없으면 권력과 쉽게 야합된다.

기독교 교회의 타락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인간 마음 속에 원래 있는 욕심이겠지만 역사적으로 A.D 313년 밀라노 칙령부터이다. 교회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내민 권력을 덥석 물면서 교회의 타락은 시작되었다. 그동안 잘 견딘 박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권력화되면서 세습은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거쳐 1139년 2차 라테리노 공의회에서 예외없는 사제독신제법을 만들어 공포했을 정도다. 세습을 종식시킨 것은 다행이지만 제도화된 권력은 바티칸으로 집중되었다.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 이전한 것이다. 여기서 일어난 부정과 부패는 개신교의 종교 개혁으로 이어진다. 종교개혁은 이런 권력을 하나님에게도 돌리자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를 구호로 삼았지만 결국은 권력을 개교회로 분산시킨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권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힘의 통치, 지배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히브리어로 ‘엘 샤따이’이며 여기서 ‘엘’은 ‘하나님’이고 ‘샤따이’는 ‘두 개의 젖가슴’을 뜻한다. 모성적 사랑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긍휼’에서 ‘긍휼’ 역시 히브리어로 ‘라훔’인데 그 뜻은 여성의 ‘자궁’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헴’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모성적이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이 아니다. 가질 필요도 없다. 섬김 자체가 그 나라이다.

이런 나라는 제도권에 없다. 제도권과 뚝 떨어진 외딴 곳, 광야에 있다. 세례 요한, 즉 광야의 소리는 정직하다. 불의한 권력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국 헤롯왕의 부정을 지적하다 목이 베인다. 헤롯의 생일이었다. 자기가 태어난 날 그는 의인을 죽여 축하한다. 불의한 권력은 남을 죽여 권력을 세운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예수의 십자가와는 정반대다. 제도와 광야의 차이다. 일부 독재자들은 백성을 죽여 자신의 권력을 세웠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인다. 권력의 속성이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백성을 더 많이 죽였으리라.

그런데 개신교의 영향력 있다는 지도자들이 권력의 중심을 배회한다. 한국 교회의 거대 급성장에는 바로 이 권력이 배경에 있다. ‘조찬 기도회’는 불의한 권력을 비호하며 찬양하는 자리다. 평상시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주장하다가도 권력만 만나면 그가 예수를 믿건 누구를 믿건 상관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이비 주술과 무속을 자행해도 그 권력을 추종한다. 그들이 믿는 것은 권력과 맘몬(재물의 신)이다. 그 권력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찬양하고 기도한다.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도 상관없다. 오직 권력이다. 혹시 작은 교회들이 이들을 성공의 모델로 여기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는 그들 개신교 지도자들이 제주 4.3 민중항쟁, 여순민중항쟁 등 양민학살, 5.18 민중항쟁, 용산참사, 세월호 참사의 억울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이 살인적인 해고를 당하여 죽임을 당하고 망루에 올라서 농성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제도권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들은 광야의 소리를 외면한다.

종교가 이 정도니 정치는 말하나 마나다. 제도권 정치는 더하다. 국민이 180석을 줘도 세월호 진상 규명은 이제 관심도 없다. 철저히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겠다는 공약은 어디로 갔는가? 책임자 처벌은 있을 수도 없다. 권력은 권력을 상대할 뿐 권력을 해치지 않는다. 그 권력이 불의하건 말건 말이다. 오히려 쓸만한 적대적인 권력을 파트너로 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적과의 동침이다. 여당과 야당은 서로 파트너다. 죽일 듯이 싸우면서도 칼로 물을 베는 부부 모습이다. 둘 다 제도권이다. 광야가 아니다. 제도권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야당을 했다. 야당(野黨)의 야(野)는 들 야다. 광야(廣野)의 야다. 그러나 세 번의 권력을 잡더니 그 야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안하무인이다. 당헌까지 바꿔 성범죄의 두 시장 보궐 선거에 입후보자를 냈다. 둘 다 떨어졌다. 백성을 어떻게 보고 이런 짓을 하는가? 아니 측은하기까지 하다. 제도권의 권력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 광야에 없기 때문이다. 광야는 제도권에서 떨어진 곳이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자신이 제도권의 일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본다. 자기 성찰이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 동안 사람들을 치유하고 돌보는 그 바쁜 일정에서도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이른 새벽,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광야의 시간이다. 외딴 곳, 자신의 일상에서 떨어진 광야다. 그리고 거기서 기도하신다. 이 시제는 미완료다. 미완료란 규칙적인 습관이다. 광야에 머물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평생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제도권으로 가지 않았다.

사실 제도권은 적어도 교회의 자리는 아니다. 그리고 그 역시 광야의 소리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 광야의 소리는 2,000년이 지난 작은 예수들에 의해, 그리고 광야에 머무르고 있는 재야의 사람(在野人士)들에 의해 외쳐졌다. 그것이 예수의 부활이라고 나는 믿는다.

광야의 외침이 광야를 잃어버린 정치, 종교, 교육, 노동, 예술, 그리고 우리 사회가 광야로 돌아오는 소리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 목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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