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종수의 ‘예수, 위로의 마을에서 꾸짖다’···홍순원 “치밀한 분석, 깊은 묵상, 그리고 선포”

[아시아엔=홍순원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영성수련원 원장] 목포 산돌교회 김종수 목사님이 <기독교사상>에 연재한 설교들을 이렇게 <예수, 위로의 마을에서 꾸짖다>라는 ‘설교집’으로 묶어 냈다. 한편으로는 축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심 질투가 난다.

“나도 설교 내용이 이런 수준이 되면 한번 용기를 내볼 텐데” 하고 말이다. 제가 이렇게 축하하는 이유는 축하를 받을 만한 좋은 설교집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마다 설교집을 낸다. 네게도 종종 설교집을 선물로 보내오곤 한다. 그러나 서재에 설교집이 꽂힌 적은 없다. 그 즉시 폐지가 된다.

정말 어쩌다 서재에 두는 설교집이 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설교집인 <존재의 용기>나 <새로운 존재>처럼 설교집이지만 깊은 신학적 성찰이 담겨 있고, 복음의 생명이 살아있는 경우다. 김종수 목사님의 설교집이 그런 경우다.

화려한 수사와 감동을 주어도 그리스도적 설교 아니라면 

목사가 선포한 설교를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 설교가 그리스도교적 선포로서 적합한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예배에서 선포할 내용은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복음이 아닐 때 아무리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고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더라도 그 설교는 그리스도교적 설교라고는 할 수 없겠다.

반대로 회당에서 설교를 마치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벼랑으로 끌고 갔는데, 회중에게는 거슬리지만 그 내용에 하나님 나라가 충만히 담겨 있다면 이것은 좋은 설교다. 설교는 말로 선포하는 것이며, 듣는 청중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 설교를 평가할 때는 두 요소 즉 ‘복음적인 내용’이라는 요소와, 청중에게 ‘감명을 주는 수사’적인 요소를 고려하게 된다.

이런 두 요소를 밑바닥에 두고 내가 나의 설교를 준비할 때나 다른 분의 설교를 들을 때 나름대로 설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개혁교회 전통의 설교론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의 설교론과 루돌프 보렌(Rudolf Bohren)의 설교론, 그리고 윌슨(Paul Willson)의 설교론이다. 이 세 설교론들은 서로 강조점을 달리하면서도 같은 안목을 가지고 좋은 설교의 지침을 안내하고 있다.

이 분들의 설교론의 핵심은 그것이 그대로 김종수 목사님의 설교 비평이라고 생각된다. 칼 바르트에 따르면 설교는 ‘신학적이고 성서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바르트는 설교라는 것이 따로 없다. 그 설교가 한편의 복음적인 신학이고 성서주석일 때, 그것이 좋은 설교라는 것이다. 이런 설교는 철저히 본문에서 출발해야 하며, 설교자는 주석에 앞서 자신의 전 존재를 말씀 앞에 걸어야 한다. 이런 설교를 할 때, 이 설교는 회중을 지향해야 한다.

예수의 성전 정화

루돌프 보렌의 설교론의 핵심이며 비평의 기준은 ‘성령론적·성서적’ ‘성서적·신학적’ ‘신학적·미학적’이라는 세 축이다. 이 세 쌍의 축은 삼위일체처럼 뗄 수 없는 상호 고리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보렌의 설교론의 출발은 성령이다. 성령의 사역에서 출발하는 설교이기에 인간의 언어와 문화라는 한계에도, 설교는 자유롭고 다채롭게, 또 미학적으로 선포되며 기적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설교는 바로 단 ‘하나의 이름’과 ‘그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특히 보렌의 설교론은 불름하르트 부자(Johann Blumhardt와 Christoph Blumhardt)의 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죄의 정복과 치유라는 경건에서부터 그 설교가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정복과 해방이라는 하나님 나라 지평으로 확대된다.

윌슨은 고대 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모범 설교를 제시하며 그 설교들을 분석적으로 비평했다. 그리고는 좋은 설교를 이렇게 안내했다. “성서, 신학, 수사학의 요소가 서로 분리할 수 없이 한 설교 안에 통합되어 있을 때 시대를 움직이는 살아있는 선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렌의 설교론과 통한다. 이같은 기준들에 적합할 때, 이 설교는 “세계교회사적인 지평의 설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후회와 홍수 심판, 그러나 노아 한 사람

김종수 목사님의 설교 한편을 본다. ‘하나님의 후회와 홍수 심판, 그러나 노아 한 사람’,(<기독교사상>, 2017년 7월호)이라는 설교다. 설교학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고, 내 경험이다. 어떤 분은 “목사가 일년에 서너편만 히트쳐도 설교 잘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 설교자가 일정한 신학수준과 교양, 그리고 인문학적인 바탕과 문장력이 있으면 매 주일 고르게 높은 수준의 설교를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거꾸로 일정하다.

김종수 목사님 설교는 그 전개하는 방식이나 내용, 그리고 목사님 자신이 가진 신학적 역량과 인문학적인 바탕의 든든함 때문에 모든 설교가 일정하고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 한 설교만을 살펴보는 것으로도 목사님의 모든 설교를 보는 것과 같다.

목사님 설교의 첫째 특징은 철저한 성서원어 분석이다. 직접 예를 보겠다. “사람의 번성(라바)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복(1:28)이 아니다. 사람이 땅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1:1) 그것은 죄로 인한 오염의 시작(학할:오염·모욕· 더럽혀짐)이었다. 사람(아담)의 번성은 죄의 번성이다. 그리고 땅(아다마)의 오염이다.”(130쪽) “하나님의 아들들의 권력, 또는 이들이 선택한 사람의 딸들과 함께 만든 힘의 행사는 사람이 보기에 우러러 보는 ‘용사들’(깁보림)이나 ‘명성이 있는 사람들의 화려함’일지는 모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구제받을 수 없는 전적인 타락이다. 그래서 네피림(복수명사로서 원형은 ‘네필’이고, 어원은 ‘타락하다’하다는 뜻의 ‘나팔’)이다.”(151쪽) 이렇게 철저한 원어 분석과 해설을 통해 문맥의 뜻과 그 문맥이 전하려는 의도가 분명해진다. 이 성서언어의 분석은 종교개혁자들, 특히 인문주의자였던 칼빈이 강조한 것이었으며, 이 성서원어에 대한 탐구를 통해 프로테스탄트의 ‘오직 성서’ 전통이 확립되었다. 곧 원문해석이 메시지인 셈이다.

다음으로는 이 철저한 성서의 언어추적은 칼 바르트 견해대로 신학적인 시각으로 풀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신학적인 내용은 구약과 신약을 복음의 눈으로 꿰는 깊은 묵상의 결과다. 목사님은 창세기 6장 5절을 “야훼는 땅(에레츠)에 사람의 악(라아트)이 많은(라바) 것을 보셨다.”고 직역하면서, “5절 후반부가 너무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지만, 다만 그 내용은 악을 행하게 된 인간의 마음이 악함을 하나님이 보셨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이 분명하다.(132쪽)”고 하면서 행위를 낳은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 질 수 있다는 유대인의 구원관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그 잘못을 지적받고 있는 것이다.” 하면서 구약 자체에서 바울이 다룬 율법과 행위 문제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신학적 주제를 예수님의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려는 것이다”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확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신 말씀(마5:17,18)과 연결 짓는다. 그러면서 율법이 철저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도 예수께서 율법의 행위 이전, 즉 마음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며, 당시 행위만을 따진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한 것도 ‘더 나은 의’가 행위를 낳은 ‘마음의 의’임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창세기에서부터 행위와 율법과 마음이라는 신학적인 주제를 언어분석을 통해 제기하며, 묵상을 통해 이 주제를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 지으며, 율법의 참된 완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목사님은 구약을 본문으로 하든 신약을 본문으로 하든 그 본문에서 신구약 전체를 아우르며 메시지를 찾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 역시 구약본문에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개혁교회 성서해석의 전통이다.

세번째로는 목사님의 설교는 예술적 감각, 곧 미학적으로 표현되면서 동시에 세상을 향해 지평을 넓혀가며 맺고 있다. 목사님은 이처럼 “세상의 강자들이 힘과 권세를 추구할 때 노아만은 하나님의 은총을 찾았다”고 하면서 ‘노아’라는 이름 뜻을 밝힌다. ‘노아’라는 이름은 ‘멎다’, ‘쉬다’라는 뜻으로 “은총을 찾는 사람은 심판을 멈추게 한다. 참 쉼을 준다.” 하는 복음을 목사님은 그 주일의 메시지로 선포하며 이런 노아를 통해 사람만이 희망임을 역설한다(138쪽). 그리고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이 역설을 박노해의 시로서 음미하게 한다. 이 음미로써 이제는 청중이 말씀을 새기는 묵상으로 들어가게 된다(139쪽).

희망찬 사람은 / 그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 그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 시는 다시 잔잔한 우화로서 짤막하게 반복되며 묵상을 깨달음이 되게 한다.

꾀꼬리가 하나님께 가서 불평을 했다. 개구리의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서 노래를 계속 부르려무나. 네가 그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욱 시끄럽잖니.”

이 내면의 각성은 이제 세상과 하나님 나라로 향한다. 목사님은 “후회와 절망, 원망과 불평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우리가 불러야 할 아름다움의 노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이켜 다시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그 은총의 빛을 들고 광장에 섰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사람다운 사람, 노아 한 사람으로 다시 열리는 새로운 세상이다.”하면서 설교를 맺고 있다.

아름다운 설교는 읽는 즐거움도 준다. 여기 실린 설교들이 우리 동역자들에게 희망과 새 세상에 대한 자극을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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