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전 예수와 한국정치···’우러러 봄’에서 ‘꿰뚫어 봄’으로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허니문 기간도 없이 지지율이 내리막이다. 대통령도 대통령이지만 유권자가 더 문제다. 두세 달도 못 지나 지지를 철회할 사람을 왜 뽑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래도 지지하고 저래도 지지하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낫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둘 다 지도자를 보는 눈이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아니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여기며 지지한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에 눈이 멀어 그토록 열광적으로 지지했으며, 그리고 몇 달 되지도 않아 이번에는 무엇을 보았기에 그로부터 등을 돌리는가? 그리고 자나 깨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도대체 해바라기가 되었는가? 사람 보는 그 눈이 심각한 상태다. 모두가 시각장애인이다.
신약성서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한 시각장애인을 치유하는 이야기(마가복음 8:22~26)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좀 희한하다. 이 시각장애인은 단번에 치유되지 않는다. 예수가 두 번에 걸쳐 손을 얹어 치유한다(막 8:23, 25). 한 번에 눈을 뜨게 하지 못한다. 그 정도로 이 시각장애인이 중증인가? 아니면 단번에 고치지 못하는 예수의 치유 능력의 한계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단번에 치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가는 이 시각장애인을 ‘눈 먼 사람 하나’(마가복음 8:22)라고 한다. 이 ‘하나’는 대표단수다. 누구를 대표하는가? 이 사건은 ‘벳새다’에서 벌어진 일이다. ‘벳새다’라는 지명의 뜻이 ‘어부의 집’이다. 예수의 제자 대다수가 어부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의도적인 지명 설정이라고 본다. 더욱이 벳새다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고향이다(요 1:44). 그렇다면 ‘눈 먼 사람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을 나타내는 대표단수가 아닐까?
사실 이미 이 치유 사건 직전에서 그 시각장애인이 제자들이라는 증거는 더 뚜렷하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이야기(마가복음 6:30~44)와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은 이야기(마가복음 8:1~10)를 두고 제자들은 그 빵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두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가복음 8:21)라는 화두를 던지며 답이 없이 끝을 낸다. 문제를 낸 분이 답을 주지 않았으니 이 질문은 여전히 지난 2,000년 동안 시대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화두다. 사실 제자들은 그저 먹고 배부른 생각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가복음 8:15)고 경고한다.
‘누룩’이 상징하는 바는 ‘양적 힘’이다. 그저 높고 많고 크면 그만인 당시 종교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바라새파와 강력한 지배 권력 집단인 헤롯당의 시각이다. 어쩌면 이 시각은 많고 높고 큰 것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눈먼 우리의 시각일지 모른다. 앞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한 “주의하라”(호라오)도 “조심하여라”(블레포)도 모두 그 원뜻이 ‘보다’이다. 결국 눈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데려왔다. 예수는 이 시각장애인을 치유하기 위해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간다(마가복음 8:23). 왜 마을 안에서 치유하면 안 되는가? 안 된다. 마을은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거기에는 그 마을을 지배하는 통념이 자리한다. 로마시대 통념의 마을, 그 마을에 사는 통념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겠는가?
이 치유 이야기는 이 치유 직후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를 향한 길에서 벌어진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도시다. 황제는 최고 권력자다. 이것이 당시 가장 중요한 지배 통념이다. 이 도시를 향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가복음 8:27)고 물었다. 사람들이 예수를 보는 통념의 눈을 물은 것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로 손꼽히는,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로 본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 반열에 올린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가복음 8:29)고 물었다. 제자들의 눈을 물은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스도’란 메시야 칭호다. 그런데 예수는 베드로를 ‘꾸짖었다’(에피티마오, 마가복음 8:30).
그런데 왜 예수는 베드로를 꾸짖었을까? 더 높은 자리를 원한 것일까? 여기서 시각장애인을 치유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예수는 그에게 손을 얹고 “무엇이 보이느냐?”(마가복음 8:23)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쳐다봤다”(마가복음 1:24). ‘쳐다보다’는 헬라어로 ‘아나블레포’이다. ‘위로’라는 뜻의 전치사 ‘아나’와 ‘보다’라는 뜻의 동사 ‘블레포’의 합성어다. 예수를 쳐다보는 존재, 즉 ‘우러러본’ 것이다. 위대한 예언자와 메시아를 추앙하듯 우러러본 것이다.
우러러보는 것, 이것이 종교와 정치의 가장 저급한 눈뜨임이다. 우러러보는 그 존재 앞에서 자신의 소원을 기도하고 기대한다. 오늘의 종교와 정치의 통념이 아닐까? 그저 우러러보며 구걸하고 환호하는 종교와 정치다. 예수 당시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 사상이다. 그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구원해줄 것이라고 여긴다.
오늘 정치도 다르지 않다.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메시아 선거다. 우러러보는 지도자에 환호한다. 모든 문제는 그가 해결할 것이다. 이 통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마을 밖으로 이 시각장애인을 데려간 것이다. 우러러봄이 통념인 마을을 벗어나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치유는 한발 더 나아간다. 두 번째 치유가 이어진다. 그 시각장애인은 뚫어지듯 본다. ‘뚫어지듯 보다’는 헬라어로 ‘디아블레포’이다.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와 ‘보다’라는 뜻의 동사 ‘블레포’의 함성어다. ‘꿰뚫어보다’이다. 비로소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막 8:25). ‘분명하게 보다’는 헬라어로 ‘엠블레포’다. ‘안에’를 뜻하는 전치사 ‘엔’과 ‘보다’를 뜻하는 동사의 합성어다.
꿰뚫어보니,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력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는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마가복음 8:26)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우러러보는 것이 통념인 마을에서는 여전히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을, 그런 세상에서는 우러러보는 것이 전부다. 우러러보는 대상에게 목을 건다. 그래서 그런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우러러보기는 쉽다. 우러러보는 대상에게 맡기면 된다. 그러나 거기 민주주의는 없다. 민주주의는 민이 주인인 이념이다. 민이 꿰뚫어보고 민이 행동한다. 민이 우러러보기만 하는 정치, 중우정치다. 우러러보는 표를 계산한다. 다수가 통념이다. 종교로 말하자면 우상 숭배다. 우상 숭배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우상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자기가 할 일은 없다. 메시아에게 빌 뿐이다. 구걸하는 신앙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예수에게 꾸짖음을 당한다(막 8:33). 우러러보는 그리스도가 만병통치인 베드로다. 그의 신앙의 통념이다. “믿으시기 바랍니다”에 “아멘!” 하면 된다.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에 구원의 목을 맨다. 구원도 예수의 십자가에 편승한다.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꿰뚫어보면 다르다. 우러러봄에서 꿰뚫어 봄으로 눈이 뜨면 안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 분명하게 본(엠블레포) 자에게 예수는 우러러보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8:34)고 말한다. 꿰뚫어보는 사람은 더 이상 예수의 십가가를 우러러보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가 된다. 우러러보았던 예수가 자기를 구원하지도 않는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마가복음 5:34, 10:52)
정치의 우러러보는 현실은 더 처참하다. 우러러보는 메시아를 뽑듯 환호하고, 환호한 만큼 실망한다. 지지율 폭락은 당연하다. 오히려 콘크리트 지지율이 더 이상하다. 잘하든 못하든 우러러본다. 남북 민간교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남북관계는 악화되었다. 남북관계는 우러러보는 사람끼리가 아니다.
180석을 몰아주어도 국가보안법 하나 철폐하지 못했다. 세월호 그 자식 잃은 부모의 쓰라린 마음조차 쓰다듬어 주지 못했다. 박근혜와 무엇이 다른가? 민이 이루어낸 촛불정신을 훼손했다. 그렇다! 사실 우리 잘못이다! 민의 잘못이다. 우리가 우러러볼 뿐 꿰뚫어보지 못했다. 그저 우러러보는 정치적 메시아들의 십자가만 기대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만을 누릴 뿐이다. 꿰뚫어보면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진다. 민주주의는 다수라는 통념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우러러보는 사람에게 길들임을 당하지 않는다. 민이 책임지고 민이 행동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러러보지 말고 꿰뚫어 보아 따르라고 한다. 꿰뚫어본 사람의 믿음은 그처럼 사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다.